미국발 무역 혼란과 관세 불확실성이 세계 교역 질서를 흔들고 있지만, 글로벌 경제는 예상보다 강한 회복력을 유지하고 있다. 19일(현지시간)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을 3.3%로 제시했다. 지난해 10월 전망치보다 0.2%포인트 상향된 수치다. 성장률 조정의 상당 부분은 미국과 중국에서 발생했다.
관세 인상과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 재편이라는 악재가 동시에 작동했음에도 세계 경제가 급격한 둔화 국면에 빠지지 않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IMF는 무역 긴장 완화 조짐과 예상보다 큰 재정 지출, 완화적인 금융 여건, 신흥국의 정책 대응력 개선이 단기 충격을 흡수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회복은 구조적으로 균형 잡힌 반등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 경제를 떠받친 동력은 소비도, 제조업도, 교역 회복도 아니었다. 정보기술(IT), 그중에서도 인공지능(AI) 투자라는 단일 산업이 성장의 상당 부분을 끌어올린 결과였다.
제조업 투자는 주요국 전반에서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글로벌 교역 증가율 역시 팬데믹 이전 평균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급증한 AI 관련 설비투자와 기술 자본 지출이었다. 서버·반도체·데이터센터·소프트웨어로 이어지는 IT 투자가 기업 활동과 금융 시장을 동시에 밀어 올리며 세계 성장률의 하단을 떠받쳤다.
이로 인해 현재의 글로벌 회복 국면은 넓은 산업 기반 위에 형성된 확산형 성장이라기보다, 기술 부문 한곳에 하중이 집중된 ‘편중된 회복’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관세 충격은 견뎌냈지만, 성장의 구조는 오히려 더 좁아졌다는 의미다.
IMF가 이번 전망에서 반복적으로 경고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단기 수치는 안정돼 보이지만, 성장의 엔진이 특정 산업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충격의 전이 경로 역시 그 한곳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IMF에 따르면, 미국의 IT 투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준으로 2001년 닷컴 붐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상승했다. 같은 기간 제조업 투자는 회복 기미를 보이지 못한 채 정체 국면이 이어졌다. 미국 경제 내부에서 자본의 방향이 다시 한 번 명확히 갈린 것이다.
이번 국면의 특징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붐 당시 IT 투자는 단기간에 폭증한 뒤 급격한 붕괴로 이어졌다. 반면 이번 상승은 팬데믹 이후 수년에 걸쳐 완만하게 이어졌고, 2024~2025년에 들어서야 가파른 기울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IMF는 이를 “기대가 아닌 실제 설비투자가 뒷받침된 기술 확산 국면”으로 해석했다.
미국 기업 투자의 중심축은 다시 기술로 이동했다. 공장 증설이나 전통 설비 대신, 자본 지출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데이터센터·고성능 연산 장비·클라우드 인프라·소프트웨어로 집중됐다. 이는 단순한 업종 이동이 아니라, 기업 생산 구조 자체가 물리적 설비에서 연산 능력과 데이터 처리 능력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IT 투자 급증은 미국 경제 내부에 머물지 않았다. 대규모 서버 투자와 반도체 수요 확대는 한국·대만·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기술 수출국으로 빠르게 전이됐다. 미국이 투자를 집행하고 아시아가 공급망을 담당하는 구조가 다시 강화되면서, 글로벌 성장의 연결 고리 역시 기술 산업을 중심으로 재편됐다.
제조업과 교역이 주도하던 과거의 회복 국면과 달리, 이번 글로벌 성장의 파급 경로는 분명하다. 미국의 AI·IT 설비투자가 출발점이 되고, 아시아 기술 수출이 이를 증폭시키는 단일한 흐름이 형성됐다는 점이다. IMF는 이 구조가 단기 성장에는 강력한 추진력이 되지만, 동시에 글로벌 경기의 균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글로벌 증시의 가파른 상승을 두고 시장 안팎에서는 또 다른 닷컴 버블을 우려하는 시각도 나온다. 그러나 IMF의 평가는 보다 절제돼 있다. 수치상 과열은 확인되지만, 구조는 25년 전과 다르다는 판단이다.
S&P500 지수를 기준으로 한 장기 밸류에이션 분포를 보면, 현재 주식시장의 과대평가 수준은 닷컴 버블 당시 정점의 약 절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과열됐던 구간과 여전히 상당한 간격이 존재한다.
보다 중요한 차이는 주가 상승의 구성 요소다. IMF가 주가 누적 수익을 분해한 결과, 1997~1999년 닷컴 버블 당시 상승분의 대부분은 주가수익비율(P/E) 확대에서 발생했다. 기업 실적이 아닌 미래 기대가 가격을 끌어올린 구조였다.
반면 2023~2025년의 상승 국면에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주가 상승의 주된 기여 요인은 밸류에이션이 아니라 기업 이익 증가였다. 실제 수익 개선이 주가를 밀어 올렸고, P/E 확대의 기여도는 과거 버블 국면에 비해 제한적이었다.
기술주 역시 마찬가지다. 닷컴 시기에는 매출조차 불확실한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했지만, 이번 사이클에서는 반도체·클라우드·플랫폼 기업 등 이미 현금 흐름을 창출하는 기업들이 상승의 중심에 서 있다. IMF는 이를 “기대의 랠리가 아니라 실적 기반 랠리”로 규정했다.
다만 이러한 차이가 곧 안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적이 주가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상승을 설명하지만, 향후 실적 둔화가 발생할 경우 조정 역시 실물에 연동돼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IMF는 이번 기술 호황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고 경고한다. 겉으로 보이는 밸류에이션보다 더 깊은 곳에서 구조적 위험이 축적되고 있다는 판단이다.
첫째, 주가 상승의 동력이 지나치게 기술주에 집중돼 있다. 소수의 AI 관련 대형 종목이 주요 지수 전체의 방향을 좌우하면서, 특정 산업의 조정이 곧 시장 전체 변동성으로 직결되는 구조가 형성됐다.
둘째, 핵심 AI 기업 상당수가 비상장 기업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주식시장이 아닌 대출과 사모신용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며, 이는 닷컴 시기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위험 요인이다. 수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손실은 주가가 아닌 부채 부실의 형태로 금융 시스템에 전이될 수 있다.
셋째, 자산 규모 자체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미국 주식시장의 시가총액은 2001년 GDP 대비 132%에서 현재 226%까지 확대됐다. 조정 폭이 크지 않더라도 소비와 자산 효과를 통해 실물 경기로 전이될 충격은 과거보다 훨씬 크다.
이 세 가지 요인이 맞물릴 경우, 기술주 조정은 단순한 증시 변동을 넘어 금융 여건 전반의 긴축과 실물 소비 둔화로 확산될 수 있다고 IMF는 진단했다. 거품은 작아졌지만 충격의 전파 경로는 오히려 넓어졌다는 의미다.
기술 투자 확대는 완화적인 금융 여건 속에서 진행됐다. 풍부한 유동성과 견조한 기업 실적은 주가 상승과 자본 지출을 동시에 떠받쳤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차입 의존도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기술 투자 확대와 함께 기업 레버리지가 상승하면서, 성장 국면에서는 수익을 키우지만 충격이 발생할 경우 손실 역시 증폭시키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와 서버 설비는 기술 진화 속도가 빠른 만큼 감가상각 주기가 짧다. 잦은 설비 교체는 감가상각 비용과 이자 부담을 동시에 키우며, 투자 회수 이전에 추가 차입을 요구한다. IMF는 이러한 구조가 금융 여건이 긴축 국면으로 전환될 경우 기업 재무를 급격히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IMF가 제시한 성장률 수정 추이를 보면, 2025~2026년 글로벌 성장 전망은 관세 충격에도 불구하고 점진적인 회복 경로를 유지했다. 단기 충격은 흡수됐다는 평가다. 그러나 무역 혼란의 비용은 통계에 즉각 반영되지 않는다. 관세와 수출 규제, 핵심 원자재 통제는 시간차를 두고 누적되며 기업 투자와 공급망 비용을 지속적으로 압박한다. 문제는 이러한 무역 리스크가 기술 투자 사이클과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AI 수익성이 흔들릴 경우, 누적된 무역 비용과 금융 부담이 한꺼번에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미국 주식에 대한 외국인 보유 비중이 크게 확대된 것도 위험 요인이다. 기술주 조정은 미국을 넘어 글로벌 소비 위축과 자본 회수 압력으로 번질 수 있다. 기술 산업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고부채·저소득 국가들 역시 외화 조달 비용 상승과 수요 둔화라는 이중 부담에 직면하게 된다.
IMF는 관세 충격을 견뎌낸 현재의 안정 국면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복합적인 성장 리스크로 전환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의 회복은 끝이 아니라, 지연된 비용이 아직 반영되지 않은 상태라는 판단이다. IMF는 AI 투자가 올해 글로벌 성장률을 최대 0.3%포인트 끌어올릴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했다. 반대로 기술주 가치 조정과 금융 여건 긴축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글로벌 성장률은 기준 전망보다 최대 0.4%포인트 낮아질 수 있다고 밝혔다.
기술은 분명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그러나 투자 집중, 부채 확대,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동시에 높아지는 환경에서 낙관만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는 없다는 것이 IMF의 결론이다. 관세 충격을 버텨낸 세계 경제는 지금 또 하나의 시험대 앞에 서 있다. 이번 기술 호황이 장기 생산성 혁신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른 호황과 붕괴의 반복으로 귀결될지는 균형과 규율이라는 선택에 달려 있다.
성장은 살아났지만, 방향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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