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원/달러 환율은 단기적으로 1500원대에 도달할 것으로 보이며, 중기적으로는 1450원대로 돌아올 것이다."
네덜란드계 글로벌 금융그룹 ING는 반도체 수출 회복에 힘입어 올해 한국 경제가 2.0%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환율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1500원 테스트' 가능성을 언급했다. 다만 이 역시 뉴노멀로서의 1500원이 아니라, 넘기기 어려운 저항선에 가깝다는 뉘앙스다.
실제로 12개 글로벌 투자은행(IB)의 환율 전망을 보면 단기 평균은 1440원, 6개월은 1426원, 12개월은 1424원 수준이다. 가장 공격적인 전망도 바클레이스의 1490원에 그치며, 골드만삭스와 노무라는 1380~1390원까지의 하락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직까지 그 어느 전문기관도 1500원대 환율의 상시화를 전제하지는 않고 있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한국의 견고한 펀더멘털과 원화 약세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음에도 환율은 일시적 조정만 거친 채 다시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이 발언이 주목받은 이유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미국이 보기에도 현재 환율이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임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ING 보고서가 의미 있는 이유는, 1500원을 '목표치'가 아니라 심리적·구조적 한계선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환율이 그 선에 가까워질수록, 시장의 위험은 상승이 아니라 반전에 놓이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발간한 '글로벌 금융안정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환 리스크에 노출된 달러 자산이 외환시장 거래량의 약 25배에 달한다고 경고했다. IMF는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는 달러 자산 환 노출이 외환시장의 깊이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크다"는 것이다.
환 노출 달러 자산이란 환율 변동에 안전장치 없이 노출된 자산으로 해외 주식·채권·상장지수펀드(ETF) 등이 포함된다. 아주 쉽게 설명하면 환율이 그 어느 이유에서든 만약 현 1400원대 수준에서 1300원대로 떨어지면 환차손을 막기 위한 달러 매도가 쏟아져나와 그때부터는 환율 급등이 아니라 환율 급락이 한국경제를 덥쳐 기업이든 개인이든 막대한 환차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이다.
환율이 급변하면 투자자들은 손실을 피하려고 동시에 달러를 매도(환 헤지)하게 되는데, 이때 시장에 쏟아지는 달러 규모가 우리 외환시장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면 변동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유동성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IMF 경고의 핵심이다.
◇환율 1500원은 '공포'인가 '기회'인가? 서학개미의 역발상
환율 1500원 돌파를 기정사실화하며 '달러 불패'에 베팅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법이다. 만약 미 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하나 한국 정부의 강력한 자본 유출 방지책이 맞물려 환율이 1300원대로 급락한다면, 그간 고환율의 단맛에 취해있던 기업과 서학개미들에게는 '환차손 공포'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
그동안 정부가 세제 혜택(해외 주식 처분 시 비과세)을 내걸며 유턴을 종용하고 있지만, 시장의 데이터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최근 발표된 미 재무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미국 주식을 약 663억달러(약 98조원)어치 순매수하며 전 세계 1위 투자국(조세회피처 제외)에 올랐다.
이는 일본(126억달러)이나 대만(98억달러)을 압도하는 수치이다. 한국 투자자들이 국내 증시의 변동성을 피해 미국 빅테크와 AI(인공지능) 산업으로 자금을 대거 이동시키면서,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엄청난 '매도 압력'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서학개미들이 고환율을 오히려 보너스로 여긴다는 점이다. 미국 주가가 그대로여도 환율이 오르면 원화 기준 수익률이 상승하는 '환 쿠션' 효과 덕분에, 환율 상승기에 서학개미들의 수익률은 국내 투자자들을 능가할 수 있었다.
실제로 1월 초 재무부 발언으로 환율이 1470원에서 1440원대로 약 2% 깜짝 하락하자, 당일 미국 주식 매수세는 평소보다 1.5배 급증했다. 환율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달러를 싸게 살 기회'로 보고 자금을 더 쏟아부었다.
해외 주식 양도세 22%를 면제해 준다 한들, 달러 가치 상승으로 얻는 환차익과 미국 빅테크의 압도적인 성장성을 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서학개미들은 이제 환율을 '리스크'가 아닌 '자산'으로 인식한다. "원화 자산만 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리스크"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정부의 세제 혜택은 거대한 자본 이동의 흐름을 막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원/달러 환율이 하락으로 전환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인가.
만약 미국의 경기침체 징후가 나타나 연준이 예상보다 빠르게 금리를 내리기 시작하면, 미국과 타 국가 간의 금리 격차가 줄어들며 강달러 현상이 급격히 해소될 수도 있다. 이 경우 환율은 1500원 저항선에 부딪힌 후 실망 매물과 함께 1300원대로 빠르게 미끄러질 수 있으며, 이때가 바로 서학개미와 수출 기업들의 환차손 지옥이 시작되는 시점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플레이션은 선택"이라는 케빈 워시의 발언에도 주목해야
2026년 5월 제롬 파월 의장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차기 연준 의장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인물은 케빈 워시 전 연준 이사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또 다른 유력 후보였던 케빈 해싯 위원장의 유임을 시사하면서 워시의 지명 가능성이 더욱 독보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차기 의장으로서 그의 발언과 성향을 분석하면 향후 금리 및 환율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그는 최근 기고문과 발언을 통해 현재의 연준 시스템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공격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는 "인플레이션은 기후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책적 선택의 결과"라고 단언하며, 파월 의장의 대응이 늦고 부적절했음을 지적해왔다. 워시는 또 "AI가 생산성을 높여 물가를 낮추는 요인이 될 것"이라며, 경제 성장이 물가를 올린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성장을 가로막지 않는 수준의 낮은 금리를 선호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시나리오대로 새 연준 의장이 맞춰준다면 미국의 금리인하 사이클이 본격화되고 이는 곧 원/달러 환율에 하방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
스콧 베선트 장관 역시 지난 12일 워싱턴에서 열린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의 면담 직후, SNS와 공식 성명을 통해 "원화 약세는 펀더멘털과 무관"하다면서 최근의 급격한 원화 가치 하락이 한국의 견고한 경제 기초여건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미국이 남의 나라 환율 걱정을 해주는 데에는 세 가지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우선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와 향후 수년간 약 3500억달러(약 51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만약 원화 가치가 계속 떨어지면(환율 상승),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공장을 짓고 설비를 들여올 때 부담해야 할 원화 환산 비용이 폭등하게 되고 이는 결국 미국의 고용과 산업 재활성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된다.
한국의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이 부과하는 관세 효과가 상쇄되는 것도 문제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관세를 매겨도 원화 가치가 떨어져 한국 제품 가격이 싸지면 정책 효과가 반감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가상 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미 연준이 금리인하 사이클에 들어가고 미 정부의 원화 강세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면 그 충격으로 원/달러환율은 1500원은 고사하고 이미 뉴노멀로 인식이 되고 있는 1400원대 밑으로 붕괴된다면 거대한 환차손이 한국경제를 역습할 수도 있다.
여기에다 AI 거품론이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것도 부담이다. 뿐만 아니라 새 연준 의장에 유력 거론되고 있는 케빈 워시는 금리인하는 물론이고 연준이 너무 많은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채권의 대량 매각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미국에서 주식과 채권의 동시 대량매각이 현실화될 경우 미국 주식과 채권을 대량보유하고 있는 국내 투자자들의 동반매도가 이뤄지면서 달러 매물이 밀려들어오고 환율은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환율이 계속 오를 것으로 보고 '환헤지(위험 분산)'를 하지 않았거나, 오히려 달러 보유를 늘렸던 기업들은 재무제표상 막대한 외환평가손실을 기록하며 신용등급 하락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
결국 1500원이라는 숫자는 축제의 정점이자, 거대한 환차손의 역습이 시작되는 임계점일 수 있다. 이제는 달러의 단맛에 취할 때가 아니라, 언제든 닥칠 수 있는 '환율의 배신'에 대비해 자산(資産)의 안전벨트를 매야 할 시간이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Copyright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