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에서 한국은 강유전체 등 차세대 메모리 기술을 중심으로 특허와 연구개발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반도체 패권 구도는 기술 우위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국면으로 이동하는 분위기다. 미국 관세 정책과 현지 투자 압박, 생산 입지 재편, 전력·인프라와 같은 비기술적 변수들이 맞물리며 경쟁 승부처가 연구개발 성과를 넘어 통상·투자·정책 환경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차세대 메모리 소자인 강유전체 분야에서 한국의 특허 경쟁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20일 지식재산처에 따르면 2012~2023년 선진 5개 지식재산기관(IP5)에 출원된 ‘강유전체’ 소자 특허 가운데 한국 비중은 43.1%로 집계됐다. 연평균 증가율도 18.7%로 주요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삼성전자는 전체 출원의 27.8%(255건)로 최다 출원인에 올랐고, SK하이닉스도 13.4%(123건)로 3위를 기록. 최근 3년 기준으로는 두 기업이 나란히 1·2위를 차지했다.
강유전체는 D램 수준의 처리 속도와 낸드플래시의 비휘발성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차세대 메모리 후보로 거론된다. 기존 반도체 설비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가 설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고, AI 서버의 전력 효율을 개선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김희태 지식재산처 반도체심사추진단장은 “강유전체 소자 분야는 기술 성숙도가 높아지면서 상용화 기술 선점을 위한 특허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AI 반도체 패권 경쟁 양상은 기술 확보 여부만으로 판도를 설명하기 힘든 단계에 접어들었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와 그 파생 제품을 대상으로 한 관세 부과 가능성을 단계적으로 언급하면서, 생산 거점과 투자 규모가 핵심 변수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메모리 반도체를 만들고 싶은 기업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며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책 기조는 파운드리에 국한되지 않고 메모리와 AI 서버, 패키징을 포함한 공급망 전반으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미국 백악관은 반도체와 파생 제품에 대해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으며, 미국 내 생산 시설을 구축할 경우 관세 상쇄 프로그램을 적용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이에 AI 데이터센터와 서버 조립이 미국 내에서 이뤄질 경우 메모리 조달 역시 현지 생산 제품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같은 흐름은 미국과 대만의 최근 무역 합의에서 구체화됐다. 대만은 대규모 대미 투자와 정부 신용보증을 조건으로 상호관세율 인하와 함께 일정 범위의 관세 면제 혜택을 확보했다. 미국은 대만 기업이 미국 내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건설하는 동안 생산능력의 2.5배까지, 완공 이후에는 1.5배까지 무관세 수입을 허용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러트닉 장관은 “대만 전체 반도체 공급망과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 목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은 지난해 한미 협상에서 반도체 분야에 대해 ‘주요 경쟁국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적용받기로 했지만, 미국은 국가별 개별 협상을 통해 관세와 투자 조건을 정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미 행정부 관계자는 “국가별로 별도의 합의를 할 것”이라고 밝혔고, 이러자 대만 사례가 자동으로 적용될지는 불확실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기존 합의에 명시된 원칙을 근거로 협의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현재 1단계 조치는 일부 첨단 로직 칩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2단계 조치가 언제 어떤 형태로 나올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 여력도 변수다. 산업연구원의 경기실사지수(BSI)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 매출 전망은 7개 분기 연속 기준선을 밑돌았고,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 역시 설비투자와 자금 사정 지표가 기준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대규모 현지 투자가 현실화될 경우 해외 투자와 국내 투자 계획 간의 조정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투자 환경과 정책 신뢰성도 함께 대두된다. 최근 법원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국가산업단지 계획 승인 취소 소송을 기각하면서 삼성전자의 360조원 규모 투자 계획은 법적 불확실성을 상당 부분 해소했다. 업계 관계자는 “법적 분쟁이 정리된 만큼 전력·용수 등 인프라 구축이 계획대로 뒷받침되는지가 중요해졌다”고 전했다. 반면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거버넌스 변화와 전력망 확충 지연 가능성은 여전히 변수로 남아 있다.
정부는 2026년 연구개발(R&D)에 35조5000억원을 투입해 AI·반도체 등 전략 기술 분야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업계에서는 연구개발 투자와 함께 생산 입지, 전력·용수 인프라, 통상 환경이 동시에 맞물려야 실질적인 경쟁력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미국과의 협상은 계속 이어가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내에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투자 환경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며 “통상 변수와 무관하게 기술·인프라·투자가 선순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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