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사무라이, 일본 정신의 검날 2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년)와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사무라이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두 사람 다 일본국민들이 추앙하는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추구하 는 삶의 방식이나 무사도를 구현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검을 통해 무사도를 실현하려 했다면 사카모토 료마는 검을 버리고 정치와 협상으로 일본을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한 선구자였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에도시대 초기에 활약했던 검술가였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쓴 검술과 전투 기술 일반을 다룬 오륜서(五輪書)에 의하면 무사시는 일생 총 60여회 실전을 치렀는데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실전은 날이 시퍼렇게 선 진검 을 가지고 승부를 가르는 것이었으며 누군가 하나 크게 다치거 나 죽어야 끝났다. 일본의 검술가들은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며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 도였다.
미야모토 무사시를 유명하게 만든 실전은 1601년 경에 벌어 진 일명 ‘간류지마 결투(巖流島の決鬪)’였다. 당시 미야모토 무사시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간류지마 결투는 당시 미야모토 무사시의 라이벌로 알려진 사사키 가문의 사사키 코지로와 지금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앞바다에 있는 후나지마에서 벌인 결투를 지칭한다. 사사키 코지로는 부젠국 고쿠라번 호소카와 가문의 검술 사범이란 설과 나가토국 쵸슈번의 검술가란 설 이 있다. 어떤 설이 맞는지는 몰라도 간류라는 새로운 검술유파를 창시할 정도로 검술의 달인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미야모토 무사시가 코지로에게 시합을 요청했고 후나지마에서 싸우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시합 당일, 약속된 결투 시간을 알리는 고쿠라번의 전령이 몇번이나 방문해도 무사시는 늦게까지 자고 있었다. 무사시는 해가 중천에 뜰때 쯤 일어나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한 후, 배에서 쓰는 노를 깎아 목검을 만들었다. 그 후 배를 타고 후나지마로 향했다.
기다리다 지친 코지로는 무사시를 보자마자 분연히 “오는 것 이 늦다!”라고 말했다. 목검을 들고 무사시가 가까이 다가오자 코지로는 3척의 칼을 뽑아 칼집을 물속에 던져 버렸다. 무사시 는 “코지로, (그대는) 패하였도다. 이기려면 소중한 칼집을 버리지 않았을터!”라고 말했다.
코지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무사시의 이마를 베었지만 무사시가 가볍게 피하는 바람에 머리띠만 잘렸다. 동시에 무사시도 목검으로 코지로의 머리를 가격했다. 쓰러진 코지로에게 무사시가 다가가자 코지로는 다시 몸을 일으켜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칼은 무사시의 무릎 위쪽 옷자락만 자르고 말았다. 무사시는 목검으로 반격해 코지로의 어깨를 내리쳤고 뼈가 부러진 코지로는 그대로 기절했다.
무사시는 코지로의 입가에 손을 대고 숨이 붙어있는지 확인 한 후 심판에게 인사하고 배를 타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코지로의 제자들이 화살을 쏘았으나 붙잡히지 않았다.
이 내용이 유명해진 계기는 요시카와 에이지가 무사시의 문하 제자들이 기록을 남긴 무공전과 이천기(니텐기)를 원 사료로 삼아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집필했기 때문이다. 다른 역사 기록에서도 약간씩 상이한 부분은 있지만 대체로 후나지마에서 무사시가 목검으로 코지로와 싸워 이겼다라는 내용은 일치한다. 이후 후나지마는 패배한 사사키 코지로의 유파인 간류를 따서 간류지마로 불리게 됐다.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가 대결한 간류지마 결투는 수백년이 넘는 일본 검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합이었다. 일본에서 간류지마 결투는 결투의 대명사가 됐다. 1954년 2월 한국 태생의 스모선수 출신 프로레슬러 역도산과 유도 스타 키무라 마사히코가 편을 이뤄 미국의 벤-마이크 사프 형제와 맞붙은 이종격투대결이 벌어졌을 때 일본 신문에서는 ‘쇼와의 간류지마’(‘쇼와시대-1926~1989년’에 벌어진 세기의 결투라는 뜻)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현대에도 라이벌 격인 유명한 격투가나 스포츠선수들이 경기를 벌이면 간류지마 결투를 빗대어 홍보를 하곤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뇌리속에 깊게 박혀 숙적끼리의 대결이라 하면 바로 간류지마 결투를 떠올리곤 한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또한 도장깨기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도장깨기는 각지의 여러 무술의 고수(주로 검법)들과 계속해 겨뤄 자신의 독창적인 무예를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이후 극진가라 데의 창시자인 최배달이 무사시처럼 전국의 가라데 도장을 돌며 도장깨기를 통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일본 대중에게 추앙받는 것은 단지 무술의 달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무예에 버금갈 정도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남긴 10여점의 수묵 화는 검객다운 패기가 넘치면서도 묘사가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처세에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각지를 전전하며 다이묘를 모시는 자리인 시칸 자리를 찾아다녔지만 쉽게 등용되지 못했다. 우선 시칸의 봉급을 지나치게 높게 불렀다. 당시 실력있는 검술사범이 보통 쌀 200~500석 정도를 받았는데 무사시는 무려 1000석을 요구했다. 게다가 성격조차 고분고분하지 않고 고집이 세서 검술의 대가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를 곁에 두려는 다이묘가 별로 없었다.
1640년 우여곡절 끝에 구마모토의 영주인 호소카와 다다토시의 휘하에서 50석 정도의 부지미(봉록)을 받는 객장(손님)이 됐다. 그곳에서 그림과 병법서를 남기며 비교적 평온하게 말년을 보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는 구도자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사무라이에서 말하는 무사도를 제대로 구현한 인물로 꼽힌다. 다만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서슴치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미야모토 무사시에 역사적 기록이 그리 많지 않고 현대인들이 인식하는 모습은 대부분 소설속에서 신격화된 측면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았던 검객 야규 무네노리와 대결 하지 않아서 그가 진정한 최강 검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야규 무네노리는 당대 사료에도 활약상이 풍부하게 기록 되어 있고, 무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워 1만2500석의 야규번의 초대 번주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사사키 코지로와 벌인 세기적인 대결도 상당 부분 와전되거나 혹은 과장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제자 중에 유명한 인물이 단 한명도 없다는 점도 그가 진정 최강의 검객이었는지 의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가 불멸의 이름이 된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1892~1962년)가 1935년부터 아사히 신문에 연재한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가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부터 였다. 연재소설은 나중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현재까지 무려 1억2000만부가 팔렸다. 어찌 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인들이 염원했던 사무라이상이 역사적 인물속에 투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이후 만화와 영화 드라마 속에서 수없이 변주되고 있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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