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군대를 보낸 유럽 8개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한 데 대해 8개국 정상은 공동성명을 발표해 주권을 수호할 것이라며 강력한 대응 의지를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을 달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때가 지나갔다면서, 미국이 관세를 실제 높일 경우 그에 따른 보복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18일(이하 현지시간)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핀란드 등 정찰 임무 수행을 위해 그린란드에 군을 파견한 8개국 정상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은 대서양 관계를 훼손하고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우리는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보도했다.
신문은 이들 정상이 이날 긴급 회담을 통해 지난해 미국과 무역 협정을 맺은 이후 중단됐던 930억 유로(한화 약 159조 원) 규모의 미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 방안을 재검토했다고 전했다. 이 관세 부과 방안은 오는 2월 6일까지 유예된 상태였는데, 자동차와 공산품, 식품 및 음료 등 미국산 제품에 부과될 예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통상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연합(EU)가 만들어 놓은 조치인 '반강압수단'(ACI, Anti-Coercion Instrument)을 발동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신문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위협을 실행에 옮길 경우, 반강압수단을 발동해야 한다고 다른 정상들에게 촉구했다고 프랑스 언론이 그의 참모진을 인용해 보도했다"고 전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역시 "프랑스는 2023년 도입 이후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ACI를 활용해 보복해야 한다고 EU에 촉구했다"며 "여기에는 투자 제한을 포함해 미국 대형 기술 기업들이 제공하는 특정 서비스의 수출을 제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ACI에 대해 "원래 중국의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고안된 조항"이었다면서 "EU가 관세나 투자 제한과 같은 광범위한 징벌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신문은 "18일 EU 27개국 대사들은 미국 기업의 EU 시장 접근을 제한할 수 있는 ACI의 재활성화 방안을 논의했다"며 "프랑스 재무부 관계자는 파리와 베를린이 공동 대응 방안을 조율 중이며, 양국 재무장관이 19일 베를린에서 회담을 가진 후 브뤼셀로 이동해 다른 유럽 재무장관들과 회의를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유럽의회 국제무역위원회 위원장인 독일 출신의 베른트 랑게는 EU가 ACI를 발동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EU 관계자를 인용해 "이러한 보복 조치는 이번주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가질 중요한 회담에서 유럽 정상들이 협상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 EU 외교관은 27개국 EU 대사 회의 이후 신문에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분명한 보복 수단이 마련되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피아처럼 행동하고 있다"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진정할 것을 촉구하고 그가 물러설 기회를 주고 싶다. 당근과 채찍 전략"이라고 말했다.
신문은 "서방의 국가 안보 보좌관들은 19일 오후 다보스에서 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당초 우크라이나 사태와 러시아의 침공 종식을 위한 평화 협상에 초점을 맞출 예정이었으나, 그린란드 위기 논의를 위해 일정이 변경되었다고 회담 준비 상황에 정통한 두 관계자가 밝혔다"고 보도했다.
한 EU 관계자는 "그린란드를 넘겨줄 수는 없기 때문에 이미 타협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라며 "합리적인 미국인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엄포를 놓은 관세 부과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가디언>은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EU 동맹 중 한 명인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서울에서 기자들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해 본인의 생각을 전했다면서, 이번 관세 부과에 대해서는 '실수'라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또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역시 미국의 그린란드 침공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 것이며, 이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도를 정당화하고 나토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 전역이 트럼프의 관세 부과 방침에 반발하는 배경을 두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유럽 지도자들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미국 대통령을 달래고 대서양 관계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고된 노력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트럼프가 다시 집권한 이후 EU와 나토 회원국들은 타협점을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 국방비 증액 요구를 수용하고, 불균형적인 무역 협정을 받아들이고, 백악관의 입맛에 맞게 규정을 변경하고, 유럽의 '문명 말살'이라는 비난을 묵인해 왔다"며 "이들은 나토에 대한 미국의 지원 유지와 우크라이나의 공정한 평화 협정 체결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해 왔다고 전했다.
신문은 유럽 국가들이 "그러나 트럼프가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5개 동맹국에 대해 관세 부과를 위협한 것은 레드라인을 넘은 행위"라고 판단하고 있다며 "전략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고 보도했다.
한 고위 EU 관계자는 신문에 "그(트럼프)는 동맹을 위협하고, 국제법을 문제 삼고,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협박하고 있다. 이는 레드라인을 넘은 행위"라며 "서로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고갈된 시점이 있다. 그가 그 시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EU의 고위 관계자는 신문에 "트럼프를 달래려던 시대는 끝난 것 같다"고 말했고 또 다른 관계자는 "트럼프 2.0에 대처하는 기존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EU의 외교관 및 관리들은 신문에 트럼프의 위협에 대한 공개적·비공개적 규탄, 프랑스가 제시한 ACI와 같은 강력한 대응 조치,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계획의 가속화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탈리 토치 이탈리아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은 신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에 대해 "과거 합의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며, 굴복은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았고, 트럼프는 여느 강대국처럼 오직 힘만이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라며 "이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인 결론은 이제 보복에 나설 때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유럽이 실제 보복 조치에 나서서 미국과 동맹을 폐기할 경우 입을 손실이 적지 않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신문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데 있어 미국의 무기와 정보 지원은 매우 중요하며, 유럽 각국은 이러한 지원을 즉시 대규모로 확대할 여력이 없다"고 짚었다.
유럽개혁센터(CERF)의 이안 본 부소장은 신문에 "유럽 국가들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또는 나토 회원국에 대한 무기 및 탄약 판매를 차단하거나 미국의 영상 및 정보 제공을 중단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방어 능력에 대한 위험을 고려하여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신문은 "EU의 자체 방위력 강화 계획은 2030년까지인데,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기에 이 시점을 제시한 것은 너무 낙관적인 목표로 보고 있다"며 "특히 대형 수송기나 장거리 미사일과 같은 전략적 무기 체계,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핵 억지력 구축은 더욱 요원해 보인다"고 전망했다.
영국 통상부에 정책 고문을 지내고 현재 컨설팅 회사인 SEC Newgate(뉴게이트)의 이사로 재직 중인 앨리 레니슨은 신문에 트럼프의 관세 부과 위협이 대서양 무역 관계를 "미지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제 우리는 명백히 경제전쟁과 벼랑 끝 전술의 국면에 들어섰다"라며 트럼프의 조치가 EU 국가들을 개별적으로 갈라치기 해서 대응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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