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를 새로운 통상 압박 수단으로 꺼내 들며, 인공지능(AI)과 첨단 컴퓨팅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고율 관세 부과 방침을 공식화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인 한국 기업들도 영향권에 들어섰다. 물론 당장의 직접 타격은 제한적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생산 거점과 투자 전략 전반의 재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최근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일부 첨단 반도체 제품에 대해 최대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표면적 명분은 국가 안보와 공급망 안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와 기술 패권 강화를 겨냥한 산업정책 성격이 짙다는 평가다.
이번 조치는 메모리 반도체보다는 AI 연산용 고성능 칩, 서버용 프로세서 등 첨단 시스템 반도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력으로 하는 D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제품은 당장 관세 대상에서 비켜섰다. 한국 정부 역시 "현 시점에서 국내 기업에 미치는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다만 미국 상무부가 "미국 내 투자 요건을 충족하지 않을 경우 관세를 대폭 상향할 수 있다"는 강경 메시지를 내놓으면서, 정책 불확실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문제는 반도체 산업 특유의 복잡한 글로벌 공급망이다. 한국에서 생산된 반도체가 중국·대만 등에서 패키징과 후공정을 거쳐 완제품 형태로 미국에 유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관세가 부과될 경우, 한국 기업도 간접적인 가격 경쟁력 약화를 피하기 어렵다.
시장에서는 25% 관세가 본격화될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의 글로벌 매출이 중장기적으로 3~5%가량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투자가 집중되는 북미 시장에서 가격 민감도가 높아질 경우, 고객사의 발주 전략 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내 기업들은 이미 미국 현지 투자를 통해 리스크 완화에 나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 공장을 중심으로 파운드리 생산능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고, SK하이닉스 역시 미국 내 후공정 및 연구개발(R&D) 거점 구축을 검토 중이다.
미국 내 생산 비중이 높아질수록 관세 부담은 줄어들 수 있지만, 높은 인건비와 에너지 비용, 숙련 인력 확보 문제는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관세 회피를 위해 무작정 현지 생산을 늘리는 전략은 수익성 훼손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미국 측과의 협상을 통해 관세 적용 예외 또는 완화 조치를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동시에 반도체 세액공제 확대, 인프라 지원, 연구개발 투자 강화 등 국내 산업 기반을 키워 중장기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업계에선 이번 관세 이슈가 단기 악재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반도체 산업 재편의 분기점이 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미국·중국 중심의 기술 블록화가 가속화될수록, 한국 기업들은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고 고객·지역 다변화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관세 압박은 분명 부담이지만, 동시에 AI·데이터센터 중심의 반도체 수요가 구조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 요소다. 메모리 반도체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AI 연산에 최적화된 고부가 제품으로 포트폴리오를 전환할 경우 오히려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관세는 변수일 뿐, 기술 경쟁력과 시장 지배력이 결국 승부를 가를 것"이라며 "미국의 반도체 관세 카드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던진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성대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Copyright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