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숙 더봄] 유빙(流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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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숙 더봄] 유빙(流氷)

여성경제신문 2026-01-18 13:00:00 신고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임 /copilot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만든 이미지임 /copilot

“던져!”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여행객들에게 지시했다.

“던져, 빨리 던져!”

북극 빙하로 떠난 여행객들이 서로 눈치 보며 망설이다가 포효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다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내던졌다. 최고의 셰프인 봉식은 언제 가져왔는지 고급 식기구와 음식에 쓰려고 모아 놓았던 식자재를 바다를 향해 힘껏 던졌다. 넓은 딸기 농장 주인은 정성스레 키웠던 딸기들을 박스째 던져 버렸다. 젊은 날 유명해진 소설가는 계속 책을 내야 하는 부담으로 사무실에 갇혀 수십 권의 책을 냈지만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자 여든의 굽은 몸으로 한 권 한 권 책을 내던졌다. 30대 남녀 싱글들은 자기들이 만든 가상의 집을 지체 없이 내던졌다. 60대 정치인들은 자기 명패를 내던졌다. 마약 중독자들은 마약에 취한 채 돈다발을 내던졌다. 젊은 부부들은 꽃바구니에 넣은 아기들을 몰래 물 위에 띄우고 사라졌다···.

너도나도 던질 준비하던 사람들이 아기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멈췄다. 잡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여행객들은 양조장 사장이 버리려던 술을 퍼마시며 쓰러졌다. 

미준과 주연은 처음 글쓰기 교실에서 선생님이 보여 준 영상에 놀랐다. 글쓰기 이론을 가르쳐 주는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북극 여행기 영상부터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학교 연극반에서 만나 좋아했으나 각자의 결혼으로 헤어졌다. 50년 만에 글쓰기 교실에서 다시 만났다. 글쓰기 선생은 수강생들에게 지금껏 살아온 저마다의 이야기를 이 영상에서 보듯이 풀어 놓으라고 했다. 

주연 : 어느 소설가가 인생은 소설 같다고 했어. 글쓰기 교실 영상을 보니 픽션인 줄 알지만 참담했어. 무얼 써야 할지 몰랐는데 감을 잡은 것 같아. 

미준 : 나도 영상을 보고 놀랐어. 그토록 숨기고 싶던 비루한 과거들이 그다지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지나고 나니 새로운 열매를 맺듯 부끄럼 없는 글을 쓸 것 같아.

미준과 주연은 두 번째 글쓰기 교실에 참석했다.

선생 : 안녕하세요? 여기 오신 분들은 무조건 글을 쓰셔야 합니다. 글쓰기?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한 줄이든 장문이든 자유롭게 쓰시면 됩니다. 소재도 어떤 것이든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한이나 자랑거리도 좋고, 세상 밖 풍경을 스케치하듯 글로 쓰셔도 됩니다. 수취인 없는 편지도 좋습니다. 독백이나 고해성사 같은 글도 됩니다. 혹시 알아요? 별나라로 돌아간 사람들이 어느 날 심심할 때 여러분들의 글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질문 있으시면 하세요.

수강생 1 : 전 자서전을 쓰고 싶어요. 그런데 여럿이 수다 떨 때는 이야기가 술술 나오며 신나는데 막상 펜을 들고 쓰려면 무엇부터 써야 할지 막막해요. 또 수다 떨 때는 기분이 좋은데 그때뿐, 응어리진 마음은 풀리지 않았어요. 이것을 어떻게 풀지, 글로써 가능할까요?

선생 : 아, 그것은 글로 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단지 글쓰기 과정에서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자기도 몰랐던 마음 깊이 숨어 있던 어떤 것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것이 희로애락과 그 외에 또 다른 무엇이긴 한데~ 그걸 만나는 순간···, 뭐 그런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 또한 순간이지만요. 그건 글 쓰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몫이에요. 

수강생 2 : 근데 친구들이 저물어가는 우리 나이에 자서전 한 권은 남겨야 한다고, 작가에게 대필하든가 본인이 쓴 자서전을 주는데 진부하기 이를 데 없고, 힘들고 슬펐던 우리들의 공통적인 이야기임에도 공감은커녕 거부감이 들었어요.

수강생 3 : 선생님 저는요, 눈도 침침해서 책 읽기가 어렵고 유튜브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요. 글 쓰는 시대는 이제 끝나 가는 것 아닐까요?

선생 : 좋은 질문입니다. 영상 시대에 글들은 점차 독자를 잃어갑니다. 그렇지만 영화나 연극 등의 바탕은 글입니다. 자서전일 경우 태어나 지금까지 일생을 순서별로 쓸 수도 있겠지만, 작가가 꼭 쓰고 싶은 인생의 어떤 한 부분을 잘라내어 쓴 짧은 글들을 모아 사진이나 삽화를 넣어 편집한 순서대로, 아니면 뒤섞어 구성해도 됩니다. 또한 부부나 친구처럼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함께 살아온 부분을 편지 형식으로 주고받은 것을, 예를 들면 2인 자서전을 내도 좋지 않을까요? 사실 이 생각은 회원님들 질문에 저도 모르게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주연과 미준, 선생님이 제시한 2인 자서전 쓰기에 서로 마주 보며 깜짝 놀랐다. 꼭 자기들이 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 것처럼. 어둠에서 빛을 만난 듯했다.

그때 강의실 문이 스르르 열리며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렸다. 목소리 주인공은 지난 여름방학 때 갑자기 세상을 뜬 이말분 회원이었다. 

이말분 : 갑자기 죽은 나 때문에 걱정들 많이 했을 텐데··· 나도 내 죽음에 놀랐거든. 그런데 그날 함께 죽은 사람들이 많아서 무서운 것도 몰랐어. 몸은 툭 떨어져 나갔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 마치 거대한 빙산이 조각나면서 여러 유빙이 에메랄드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아 외롭기는커녕 즐거웠어. 어디선가 성가가 울리고 나를 인도하는 합창을 들으며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어.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인사도 못 하고 온 복지관 회원들이 보고 싶어서 짬을 내어 나와 본 거야.

수강생 4 : 선생님, 너무너무 반가워요. 제가 복지관에 오가면서 보니 선생님 집 대문의 전등이 두 달째 켜져 있었어요. 문틈 사이로 활짝 핀 분꽃도 보였고요.

이말분 : 그 불빛과 분꽃이 바로 나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선생과 회원들은 당황했으나 사라진 고인의 안부에 마음이 편안해지며 다시 수업을 이어나갔다. 

수강생들은 선생이 내 준 글쓰기 과제에 끙끙거렸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다른 버전의 ‘던져’ 시리즈의 영상을 틈틈이 보여 주었다. 그들은 그 영상을 되새기며 용기를 내어 저마다 내던지고 싶었던 일들을 써냈다.

선생은 신이 나서 수강생들이 써낸 새로운 ‘던져’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 주기를 이어갔다. 집단으로 응어리졌던 수강생들의 사연이 시간 속 이야기 빙하를 이루고, 그 사연들은 부서지고 깨어지며 어디론가 물이 되어 함께 흘러갔다.

저 멀리 흰빛 아기 빙산이 솟는 듯한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픽션=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실제 사건이 아닌 꾸며낸 이야기를 통칭하며 독자에게 감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현실을 재구성하는 창작 방식을 의미한다.

여성경제신문 윤신숙 수필가·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sabina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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