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약에 우리〉 스틸
영화 〈만약에 우리〉 스틸
2025년의 마지막 날, 스크린 위로 하얀 눈 대신 내린 것은 잊고 지냈던 그리움이었다. 영화 〈만약에 우리〉가 누적 관객 120만 명을 넘어서며 차가운 극장가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한국 특유의 섬세한 정서로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비행기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시작되는 재회를 통해 단숨에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1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마주 선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의 서사는, 우리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에 봉인해 두었던 어떤 기억의 문을 기어이 열고야 만다.
‘사랑은 봄비처럼’, 가장 무해했던 시절로의 초대
영화의 첫 번째 흥행 동력은 단연 '기억의 소환'이다.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임현정의 곡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은 핵심 소재로 활용된 OST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매개체다. 2000년대 미니홈피를 장식하던 그 선율이 흐르는 순간, 관객은 08학번 은호와 정원이 처음 만났던 그 시절로 속절없이 소환된다. 아이리버 MP3에 의지해 세상을 마주하고, 온라인상의 작은 공간에서 취향을 수줍게 나누던 풍경은 이제는 사라진 시대의 아련한 정취를 자극한다. 유튜브 뮤직비디오에 달린 "세상의 모든 은호와 정원에게"라는 댓글처럼,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더 이상 나에게 상처 주지 않는 안전한 과거로 돌아가 가장 무해했던 시절의 나를 재확인한다.
한 줌의 햇볕과 1인용 소파, 청춘의 무력함을 목격하다
작품 속 은호가 고시원에 살던 정원에게 자신의 방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키며 "이거 너 다 줄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찬란한 약속을 투영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내 잔인하리만큼 차가운 질문을 던진다. 사랑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변한 것인지에 대해서다. 원룸에서 반지하로, 그들이 꿈꿨던 ‘평범한 최소한의 삶’조차 지켜내기 버거운 현실 앞에서 소박했던 1인용 소파는 끝내 반지하 문턱을 넘지 못한다. 상대를 붙잡고 있는 것이 오히려 그를 벼랑 끝으로 미는 것 같다는 열패감, 그리고 그 열패감이 갉아먹은 자존감은 청춘이 겪는 지독한 성장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내 이야기 같다"는 공감의 연대를 형성한다.
'만약에'라는 미련을 넘어 현재를 긍정하는 힘
지금 우리 관객들이 유독 이런 ‘익숙한 그리움’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는 내일의 모습을 예측하기 힘든 불안한 현실 속에서,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안전한 시간대로 회귀하려는 본능적인 선택에 가깝다. 영화 속 은호가 내뱉는 "만약에 우리가"라는 말은 미래를 바꾸려는 의지가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과거를 향해 던지는 처절한 후회의 문장이다. 하지만 영화는 끝내 미련의 늪에 침잠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꿈을 꿨던 시간 자체가 소중했다"는 정원의 고백을 통해 그 시절의 서투름조차 삶의 귀한 일부로 긍정하며 관객에게 깊은 정화의 순간을 선사한다. 자극적인 복수극이나 화려한 특수효과가 범람하는 시대에, 사람의 진심이 가진 투박한 힘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 셈이다.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하나의 ‘감정적 안전 자산’으로 삼으려는 심리가 맞닿아 있다.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는 대신, 이미 지나온 길이라 더 이상 나를 배신하지 않는 과거의 기억 속에 잠시 머물며 숨을 고르는 것이다. 우리가 10년 전 은호와 정원의 아픈 사랑을 지켜보며 함께 눈물 흘리는 진짜 이유는, 그들이 놓쳐버린 것이 단지 눈앞의 연인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가장 빛나던 한 조각임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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