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의 문화재 유출, 도굴꾼과 지방 권력 유착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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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의 문화재 유출, 도굴꾼과 지방 권력 유착도 한몫했다

프레시안 2026-01-17 11:37:4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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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경찰서장의 적극적인 협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고분을 파헤쳐 나온 도굴품들을 사들였다. 하지만 당시 도굴품 매매는 불법 행위였다. 조선총독부는 '고적 및 유물 보존 규칙'(1916년), 그리고 이를 보완한 '조선보물명승천연기물보존령'(1933년)을 제정하여 유물을 관리하고자 했다.

특히 후자는 조선 총독의 허가 없이 유물에 대한 발굴·보존·이동 등의 행위를 할 경우 징역·금고·벌금에 처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총독의 허가 없이 고분을 도굴하거나 행위는 물론이고 도굴품을 매매하는 행위도 명백한 불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곡옥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도굴품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도굴품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일화를 통해 그 이유를 알아보자.

▲ 조선보물명승천연기물보존령 공포 예정에 관한<경성일보>기사.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또 도굴꾼 김영조와 관련된 일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고령 지역 300여 기의 가야 고분들을 파헤쳐 도굴한 유물들을 모두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겼다. 300여 기의 고분을 도굴했으니 한두 번이 아니라 꽤나 여러 차례 그와 만났을 것이다. 고령 경찰서장이 수차례에 걸친 도굴꾼 김영조의 불법 행위를 알아채고, 그를 체포한 일이 있었다.

"오구라는 얼마든지 많이만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8·15 광복 직전에 내가 문화재를 도굴하러 다닌다는 것을 고령 경찰서장이 알고 형사 한 사람에게 '너는 다른 일을 하지 말고 김영조의 뒤만 밟아라. 김영조가 고분을 파헤치고 안에 들어갈 때쯤 그와 그 일행을 잡고, 그 매장문화재를 바지게로 지도록 해서 서장실로 데리고 오라'고 했답디다."

도굴꾼 김영조는 고분을 파헤치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도굴하려던 유물과 함께 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고령 경찰서장이 그의 뺨을 두 번 때리고 "이번은 특별히 용서하니 앞으로는 절대 도굴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도굴품만 압수하고 그를 풀어주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도굴꾼 김영조는 이에 대해 고령 경찰서장이 "곧 대구의 오구라에게 전화를 넣어 '도굴품을 빼앗아 두었으니 내려오시오' 하면 오구라는 밤중이라도 술병을 들고 자가용 차 편으로 서장 관사에 달려와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서장은 오구라가 주는 사례금을 받았다"고 전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이와 같이 가야 고분을 파헤쳐 나온 도굴품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권력의 비호(庇護)를 받았던 것이다. 경찰서장이라는 권력자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도굴품 수집이라는 불법 행위를 눈감아줬을 뿐만 아니라 이에 편승하여 여러 차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사례금을 챙겼다. 오구라 다케노스케, 도굴꾼, 경찰서장은 '조선 보물명승천연기물 보존령'을 어겨 처벌받을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전기왕'이자 대구·경상도 지역의 권세가였던 오구라 다케노스케 앞에서 이 법령은 한낱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았다.

경주의 보통학교 교장과 경찰서장의 협조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경주 지역에서도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도굴품을 손에 넣는 불법 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치바 젠노스케(千葉善之助)라는 자가 1938년에 계림 보통학교(1907년 4월 1일 개교, 현 계림초등학고)에 교장으로 부임한 이후 학생들을 동원하여 신라 고분을 도굴하고 이를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일화가 있다.

치바(千葉善之助) 교장은 경주 계림 보통학교에 부임한 뒤 일요일마다 6학년 생도(生徒) 가운데 힘센 아이 15명을 뽑아 도시락을 싸고 지게에 바지게를 끼우고 괭이를 갖고 모이라고 했다. 교장은 그들을 인솔해 미리 보아 둔 신라 고분을 대낮에 무조건 파헤치게 했다.

그곳에서 나온 매장문화재는 전부 교장 관사에 지고 가게 했으며, 교장은 즉시 경주 경찰서장과 대구의 오구라에게 전화해 '매장문화재를 많이 파냈으니 와서 보라'고 했다. 오구라는 밤중이라도 술을 사 들고 교장 관사로 찾아와 경찰서장과 교장, 세 사람이 밤새도록 술 마시고 매장문화재 값은 오구라가 자기 마음대로 얼마씩 쳐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을 돌보고 학교의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교장이 학생들을 동원하여 신라 고분을 도굴하고 이를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것도 밤중에 몰래 한 것이 아니라 백주대낮에 대놓고 저지른 일이다. '일요일마다'라는 표현을 봤을 때 그가 자행한 도굴은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 도굴품들을 교장실에 모아 놨다가 어느 정도 쌓이면 오구라 다케노스케를 불러 팔아넘겼을 것이다.

고분을 도굴한 일본인 교장은 물론이고, 도굴품을 사들인 오구라 다케노스케, 그리고 이를 방조한 경주 경찰서장 또한 '조선 보물명승천연기물 보존령'에 반하는 처벌받을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처벌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 오히려 교장 관사에 옹기종기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위의 내용만을 봤을 때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본인 교장에게 신라 고분을 도굴해서 유물들을 넘기라고 사주(使嗾)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유물 값을 얼마씩 쳐준 것은 일본인 교장의 불법 도굴과 불법 매매 행위를 조장(助長)한 행위였다는 점은 확실하다.

일본인 교장이 '일요일마다' 경주 지역의 신라 고분을, 그리고 도굴꾼 김영조가 300여 기의 고령 지역의 가야 고분을 파헤쳐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여러 차례 도굴품들을 팔아넘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의 도굴품 불법 매매 행위를 비호한 것은 경주나 고령 지역의 지방 권력뿐이었을까?

유물 값을 후하게 쳐주다

먼저 경주의 일본인 교장과 김영조와 같은 도굴꾼들이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유물을 팔아넘긴 이유를 살펴보자. 그는 다른 유물 수집가들보다 값비싸게 유물을 사들였고 그 태도 또한 신사적이고 너그러웠다고 한다. 유물을 팔기 위해 그를 찾아갔던 자들은 개성과 평양, 경성의 유명한 상인들뿐만 아니라 인력거 일을 그만두고 유물을 판 자도 있었다고 한다.

경주의 일본인 교장과 고령의 김영조도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유물 값을 많이 쳐주는 등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그에게 유물을 팔아넘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유물을 매매할 때 얼마나 신사적이고 너그러웠기에 많은 자들이 유물을 팔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까. 이에 관한 일화를 확인해 보자.

어느 때 경산군에 사는 한 농부가 고려자기 죽작문주전자(酒煎子竹作門)를 가지고 갔는데, 천원 정도 예정하고 갔었으나 오구라는 무척 그 물건이 마음에 들었던지 오천 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거액을 손에 드니 환장하다시피 하여 제정신을 잃고 거리로 돈 자랑을 하며 다니고 음식점에 들어가 떠들다가 경찰에 걸려 버렸다. 자금 출처가 오구라라고 해서 오구라에게 문의했더니 자기가 분명히 준 돈이라고 얘기하고 자동차를 보내서 태워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농부가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고려자기가 도굴한 것인지, 농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제정신을 잃고 돈 자랑을 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29년 당시 조선인/일본인 남성 공장노동자의 일급이 1.00엔/2.32엔이었고, 1937년에는 0.95엔/1.88엔이었다. 조선인/일본인 남성 공장노동자의 일급을 1.00엔/2.00엔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1년을 일하면 365엔/730엔을 벌 수 있다. 오천 원은 조선인/일본인 남성 공장노동자가 약 13년 7개월/6년 8개월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받은 돈을 모두 저축해야만 벌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천 원이 아니라 오천 원을 받았으니 고려자기를 팔아넘긴 농부가 정신이 나갈 만도 하다.

이 일화에서 한 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해당 지역의 경찰들과 유착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고령과 경주의 경찰서장과 돈독한(?) 유착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구와 가까운 경산군에서 벌어진 일이니 대구·경상도 지역의 권세가였던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지방경찰서에서 농부를 꺼내주는 일은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농부를 자동차까지 태워 집에 보내주는 여유도 있었다. '신사적이고 너그러'웠다는 그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유물을 손에 넣을 때 남다른 스케일(?)을 보인 일화가 있다.

개성 경찰서에 7, 8년 있다가 평양경찰서장으로 전근되어 갔던 나가타(永田) 경시가 가지고 있던 일급 고려자기 목단국문상감대화분(牧丹菊紋象嵌大花盆) 2점, 청자사자투각향로(靑磁獅子蓋香爐) 1점, 운학상감매병(雲鶴象嵌梅甁) 외 1점 합 5점은 모두 뛰어난 명품들이였는데, 평양에서 제일가는 수장가 시바타 레이조(柴田鈴三)가 십만 원을 보았으나 가격 차가 많아 매매 성립이 안 되었다. 오구라가 그 얘기를 듣자 두말없이 요구하는 값을 다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간송 전형필이 1935년에 마에다 사이이치로(前田才一郞)에게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을 당시 여덟 칸짜리 기와집 스무 채에 해당하는 2만 원에 사들인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고려자기 5점을 사들이기 위해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10만 원이 훌쩍 넘는 큰돈을 들였을 것이다. 간송 전형필이 구매한 고려자기는 1962년에 국보 63호로 지정되었고 간송미술관이 보관하고 있는데,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구입한 고려자기들도 그 가격으로 보아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우리가 해방을 맞이해서 천만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려자기와 관련된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일화가 간송 전형필의 그것처럼 회자되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와 같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높은 가격으로 유물들을 사들였고, 유물을 팔아넘긴 자가 그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그를 도와주기도 했다. '신사적이고 너그럽고 호쾌한' 그의 태도는 지방 권력과의 유착 관계와 더불어 도굴품을 포함한 여러 유물들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참고문헌

강이수, <1930년대 여성노동자의 실태-면방직업을 중심으로->, <<국사관논총>> 제51집, 1994.

이경희, <오쿠라(小倉) 컬렉션의 行方>, <<월간 조선>> 제27권 제5호, 2006.

이영섭, <문화재계 비화 (3)-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월간 문화재>> 제3권 제3호,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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