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누구의 피 위에 세워졌나: '국가폭력'이라는 거울에 비친 민낯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이 나라는 누구의 피 위에 세워졌나: '국가폭력'이라는 거울에 비친 민낯

프레시안 2026-01-17 08:13:36 신고

3줄요약

"기억하지 않으면, 또다시 반복된다."

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무거운 명제 앞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멈춰 서 있었다. "이 나라는 과연 누구의 피 위에 세워졌는가"라는 질문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장 아픈 송곳이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부터 시작된 국가의 폭력, '질서'와 '안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고문과 학살은 우리 역사의 심장부에 깊은 흉터를 남겼다.

이번에 펴낸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는 그동안 승자의 언어로 기록된 역사 속에서 철저히 침묵 당해온 목소리들을 복원하려는 시도다. 나는 노무현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에 짓밟힌 평범한 이들의 삶을 마주했다. 그들은 그저 가족 곁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어 했던 우리의 이웃이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 뒤바뀐 가해자와 피해자

우리 현대사의 비극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강제 해산되면서 시작되었다. 친일 경찰들은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했고, 그 뒤틀린 권력구조는 대한민국 국가폭력의 원형이 되었다.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사례는 이승만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말이 감방이지 침대와 응접실을 갖춘 호텔급 특별 감방'에서 지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이승만의 배려로 잔형 집행정지를 받고 군에 복귀해 군납업자로 거부가 되었다. 안두희가 미국 CIC(방첩대) 요원이었으며, 암살 배후에 이승만과 미국, 그리고 당시 기득권 세력들이 얽혀 있다는 정황은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부조리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증명한다.

전쟁 중 자행된 보도연맹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은 또 어떤가. 쌀을 나눠주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단순한 행정 착오로 수만 명의 양민이 경산 코발트 광산과 경주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기는커녕 가장 먼저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가해자들은 훈장을 달고 승승장구할 때, 유족들은 연좌제에 묶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다.

'안보'라는 이름의 고문 공장과 조작된 간첩들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독재의 시간은 '고문실의 국가' 그 자체였다. 정권은 권력의 위기가 올 때마다 무고한 시민들을 제물로 삼았다. '민족자주통일'과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대로 보냈고, 생존을 위해 바다로 나갔던 어부들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특히 보안사 서빙고분실과 남산 안기부에서 자행된 야만적인 고문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했다. "네 아내를 윤락녀로 만들고 자식은 고아원에 보내겠다"는 협박 앞에 장사 없었다. 재일동포 유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하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1980년대 학원가에서 민주화를 외치던 청년 한희철은 고문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오라고 하면 죽어버리겠다"는 유언을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고문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권에 저항하는 이들의 인간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사회전체에 공포를 주입하는 통치수단이었다. 2004년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 선명한 함몰 흔적은, 당시 권력이 얼마나 치밀하고 잔혹하게 정적을 제거했는지를 침묵으로 웅변한다.

왜 지금 다시 '고문과 학살'을 기록하는가

누군가는 묻는다. 왜 이미 지나간 불행한 과거를 다시 들춰내 분란을 일으키느냐고. 경제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부수적 피해'가 아니었느냐고 강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완결된 과거가 아니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죽음, 사과 받지 못한 고통은 여전히 우리 곁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과거의 폭력은 오늘날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불의에 침묵하는 사회, 약자를 조롱하는 시선, 권력 앞에 굴복하는 양심은 모두 그 시대의 뿌리에서 자라난 그림자들이다. 우리가 '국가폭력'의 역사를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 담긴 기록들은 단순한 피해의 목록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라는 괴물에 맞서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했던 이들의 투쟁기록이다.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고문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우리사회의 도덕적 품격을 결정짓는 잣대다.

기억은 복수가 아니라 '존엄'의 회복이다

기억하는 행위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처벌하기 위함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는 숭고한 예식이며, 다시는 이런 야만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공동체 스스로를 세우는 약속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본다는 것은,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사회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살피는 일이다.

한홍구 교수는 추천사에서 "과거사위원회의 딱딱한 보고서에 묻혀 있던 사연들이 이 책을 통해 오늘의 이야기로 살아난다"고 평했다. 나 역시 이 책이 독자들에게 단순한 분노를 넘어 깊은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잠시 멈추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 그리고 끝내 꺾이지 않았던 존엄을 떠올려 보라.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기억의 토대 위에서만 우리는 비로소 정의로운 미래를 설계할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가둘 수 없다. 그리고 그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기록하는 마음이야말로, 비정한 시대를 지탱하는 우리들의 마지막 양심이라 믿는다. 이 책이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는 작은 이정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김성수 지음, 오라티오 펴냄 ⓒ오라티오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