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유독 아꼈다…" 잡채 한 그릇으로 최고 관직까지 오른 '인물'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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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유독 아꼈다…" 잡채 한 그릇으로 최고 관직까지 오른 '인물' 정체

위키푸디 2026-01-16 16:44: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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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테이블 위에서 전통 소매를 입은 손이 잡채 면과 채소를 그릇에 버무리는 장면이다. / 위키푸디
나무 테이블 위에서 전통 소매를 입은 손이 잡채 면과 채소를 그릇에 버무리는 장면이다. / 위키푸디

겨울 끝자락의 조선은 밥상부터 달라져 있었다. 땅이 얼어붙으며 수확은 끊겼고, 임진왜란 이후 궁중 식재료 수급도 정상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왕의 식탁에는 비슷한 음식이 반복됐고, 고기보다 채소가 더 귀하게 여겨질 만큼 선택지는 제한적이었다.

이런 시기, 궁궐 안에서는 뜻밖의 변화가 시작됐다. 요리 하나를 계기로 조선의 권력 구도가 흔들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심에 선 인물은 문관 출신 이충이었다.

당시 궁중 음식은 숙수라 불린 전문 요리인 집단이 맡아왔다. 대를 잇는 기술자들이 왕의 식사를 책임지는 구조였다. 그러나 그 영역에 붓을 잡던 인물이 들어섰고,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칼이 아닌 글로 살아온 사람이 왕의 식탁을 사로잡으며 궁중 음식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요리사가 아니었던 남자, 왕의 식탁에 들어가다

조선 중기 문관의 집무 공간을 재현한 장면이다. / 위키푸디
조선 중기 문관의 집무 공간을 재현한 장면이다. / 위키푸디

이충은 본래 요리사가 아니었다. 과거를 거쳐 관직에 오른 문관이었다. 오늘날 고위 관료 선발 시험에 비견되는 과정을 통과한 인물이었다. 주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전쟁 이후 황폐해진 궁궐은 기존 질서가 흔들린 공간이기도 했다.

숙수들이 마련한 음식은 광해군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재료는 부족했고, 상차림도 단조로웠다. 광해군은 식사에 대한 요구가 분명한 왕으로 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저를 들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런 상황을 이충은 다르게 바라봤다. 출세의 통로를 문서가 아닌 식탁에서 찾았다. 왕의 식사를 책임지면 자리가 열린다고 판단했다.

이충이 선택한 해법은 채소였다. 전쟁 직후 조선에서 가장 귀한 재료였다. 문제는 계절이었다. 겨울이었다. 땅은 얼어 있었고 밭은 쓸 수 없었다. 이충은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땅을 파 토굴을 만들고, 내부의 습도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저장과 재배를 함께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냉장 기술도, 비닐하우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토굴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겨울 채소가 만든 판세 변화

겨울 채소로 만든 잡채를 재현한 모습이다. / 위키푸디
겨울 채소로 만든 잡채를 재현한 모습이다. / 위키푸디

광해군 앞에 오른 음식은 이전과 달랐다. 겨울에 보기 어려운 채소가 들어갔다. 따뜻하게 무친 잡채는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다. 실록에는 왕의 반응이 구체적으로 남아 있다. 광해군 11년 3월 5일 자 기록에는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음식이 도착했는지 묻고, 도착 전까지 수저를 대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단순한 기호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왕은 특정 인물의 음식을 기다렸다. 이는 곧 신뢰를 의미했다. 궁중 숙수들이 맡아오던 영역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주방의 질서가 바뀌었고, 이 변화는 정치로 이어졌다.

이충은 요리 솜씨를 앞세워 포도대장 자리에 올랐다. 치안과 행정을 함께 담당하는 요직이었다. 이후 호조판서로 이동했다. 나라 재정을 맡는 자리였다. 백성과 신하들 사이에서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잡채서라는 별명이 붙었다. 잡채로 판서가 됐다는 조롱이었다.

당시 권력자 한효순과의 비교도 기록에 등장한다. 더덕으로 밀병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린 정승과, 잡채로 식사를 책임진 판서의 대비라는 표현이 남았다. 판세는 분명했다. 음식이 권력을 앞섰다는 해석이 퍼졌다. 잡채 쟁반이 들어오면 판서 관복이 나간다는 말까지 돌았다. 요리 하나가 관직으로 이어진다는 냉소였다.

 

조롱 속에 남은 이름, 기록에 새겨진 평가

조선왕조실록을 연상시키는 기록 이미지. / 위키푸디
조선왕조실록을 연상시키는 기록 이미지. / 위키푸디

이충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호조판서로서 조세 제도 개편에 관여했다. 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역할을 맡았다. 재정 정책에서도 성과를 남겼다. 광해군은 이충을 두고 나랏일을 성실히 처리한 인물로 평가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1619년 이충이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이틀간 조회를 멈췄다. 공개적으로 슬픔을 드러냈다. 이후 우의정 직을 추증했다.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예우였다. 생전의 이력을 살펴보면 요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행적이다. 관료로서도 분명한 자취를 남겼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이름은 달랐다. 호조판서보다 잡채서가 더 강했다. 제도 개편보다 음식 이야기가 오래 남았다. 권력의 문턱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조선 사회는 이를 또렷이 기억했다.

4컷 만화. / 위키푸디
4컷 만화. / 위키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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