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록(BlackRock)의 지난해 실적은 단순한 글로벌 자산운용사의 호황으로 읽히기 어렵다. 15일(현지시간) 공개된 재무제표는 자산 가격의 등락보다, 자본이 어디에서 수익을 확정하고 어디에 위험을 남기는지가 어떻게 재배치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이 변화가 더 이상 글로벌 시장의 추상적 흐름이 아니라, 한국 연기금·보험사·은행의 재무제표에 수익률 격차와 규제 부담이라는 두 개의 숫자로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블랙록의 지난해 연간 순유입 6980억달러 역시 규모보다 자금의 이동 경로가 핵심이다. ETF라는 유동성 통로를 통해 유입된 자금은 사모시장·사모대출·인프라로 흘러갔다. 이는 글로벌 연기금 자금이 전통 채권과 상장주식만으로는 목표 수익률을 구조적으로 충족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반면 국민연금을 포함한 한국 연기금은 출발점부터 다른 제약을 안고 있다. 공공성, 유동성 관리, 책임투자 기준은 연기금 운용의 원칙이지만, 동시에 수익률을 사전에 제한하는 제도적 필터로 작동한다. 자산 배분은 시장 논리보다 정책·사회적 합의의 속도를 먼저 따른다. 대체투자 비중을 확대하고는 있지만, 사모대출과 비상장 인프라처럼 유동성 희생과 운용 재량을 전제로 하는 자산군의 실질 편입 속도는 글로벌 상위 연기금에 비해 구조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
이 차이는 단순한 포트폴리오 구성의 문제가 아니다. 글로벌 연기금은 블랙록을 매개로 고보수·고수익 자산에 접근하며 목표 수익률을 자산군 이동으로 해결하는 반면, 국내 연기금은 동일한 목표 수익률을 기존 자산군 안에서의 미세 조정과 위험 관리로 달성해야 하는 구조에 놓여 있다. 그 결과 기대수익률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복리 형태로 누적되고, 이는 단기 성과 논쟁을 넘어 중장기 적립금 고갈 시점과 재정 투입 논의의 시계를 앞당기는 압력으로 전환된다. 연기금의 한계는 운용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성을 유지하는 대가로 수익률 변동성을 구조적으로 흡수하도록 설계된 제도 자체에 있다.
보험사의 압력은 더 직접적이고 회계적으로도 즉각적이다. 장기 보험부채를 보유한 보험사에게 자산운용은 수익률 경쟁이 아니라 부채의 시간 구조를 얼마나 정확히 흡수하느냐의 문제다. 지급여력(K-ICS) 규제는 보험사에 부채 듀레이션과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손익계산서 이전에 지급여력비율이 먼저 흔들린다. 즉, 보험사는 이익을 얻기 전에 자산·부채 미스매치에 대한 자본 페널티를 선지급해야 하는 구조다.
블랙록이 확대해 온 사모대출과 인프라 자산은 고정금리, 장기 계약,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이라는 점에서 이 요건에 가장 근접한 자산군이다. 그러나 한국 보험사는 위험계수 적용, 해외 대체투자 한도, 자본 차감 구조로 인해 사모대출을 직접 편입할 경우 회계상 안정성과 자본비율이 충돌하는 역설에 직면한다. 결국 선택지는 둘로 좁혀진다. 듀레이션은 맞지만 수익률이 낮은 국공채·우량채권에 머무르거나, 글로벌 운용사를 통해 간접 투자하며 보수 비용과 운용 통제권, 자산 설계 권한을 외부에 이전하는 방식이다.
가장 구조적인 압박을 받는 곳은 은행이다. 블랙록이 키워온 사모대출 시장은 은행의 경쟁 상대라기보다, 은행 재무제표에서 ‘수익이 먼저 발생하던 구간’을 통째로 잘라내는 구조에 가깝다. 은행 대출은 약정 체결 순간부터 위험가중자산(RWA)과 기대신용손실(ECL)이 선반영돼 자기자본 부담이 즉시 발생한다. 반면 사모대출은 신용 위험을 규제가 아니라 수익률로 가격화한다. 이 차이로 인해 동일한 신용이 은행 대출로 남느냐, 사모 신용으로 이동하느냐가 갈린다.
그 결과 우량 차주와 중·장기 프로젝트 금융은 자본 효율이 높은 사모 신용 시장으로 빠져나가고, 은행 재무제표에는 규제 대비 수익성이 낮은 대출만 남는다. 이는 단순한 순이자마진(NIM) 하락의 문제가 아니다. 이익 창출력은 약화되는데 RWA는 줄지 않고, 자본비율 방어를 위해 대출을 더 보수적으로 축소하는 역설이 반복된다. 신용을 선별하고 가격을 결정하던 은행의 기능 자체가 구조적으로 약화되는 방향이다.
블랙록 모델의 본질은 명확하다. 운용과 자본 설계는 글로벌 플랫폼이 담당하고, 자본 제공과 규제 부담은 각국 금융기관이 떠안는 구조다. 이 분업이 고착되면서 수익의 상단은 글로벌 운용사로 이동하고, 변동성과 제도 리스크는 국내 금융기관의 재무제표에 남는다. 이는 개별 기관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위험과 수익이 분배되는 방식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다.
블랙록의 실적이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누가 더 잘 벌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자본의 구조를 설계하고 누가 그 결과를 감내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분리는 이미 진행 중이며, 재무제표는 그 변화를 가장 먼저 드러내고 있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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