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타이어를 바꾼 후 상쾌하게 달려 우리는 마침내 체팔루(Cefalù)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은 이곳을 ‘에메랄드빛 바다와 중세 건축물이 어우러진 시칠리아의 보석’이라 적고 있다.
실제로 도착해 보니 과장은 아니었다. 바다색은 눈이 시릴 만큼 맑았고, 하필 그날의 구름은 다빈치라 해도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건축물도 확실히 중세의 것이 맞았다. 문제는 내가 그 보석을 즐길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행자라면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해변에 누워 책을 읽다 졸고, 마음이 내키는 곳에서 차가운 맥주를 마신다. 마침 체팔루는 맥주 축제 중이었지만 우리는 맥주 한 잔 마시지 않고 도시를 훑듯 지나갔다. 마치 여행지 취재를 나온 사람들처럼 바다를 찍고, 골목을 찍고, 구시가지에 숨어 있는 ‘중세의 세탁소’라 불리는 포인트를 찾아 빠르게 걸었다.
체팔루 대성당에서는 12세기 나무문을 잠깐 만지는 둥 마는 둥 지나쳐 황금 모자이크 예수상을 사진에 담았다. 액자처럼 바다를 끌어안은 어부의 문(Porta Pescara)을 보고는 곧장 바닷가로 내려왔다.
<시네마 천국> 의 배경으로 등장했던 해변에는 관광객이 많았고, 그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팔아야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관광지는 어디나 그렇다. 즐기기 위해 온 사람들과, 살아가기 위해 그 즐거움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섞여 있다. 시네마>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란치니와 감자튀김, 수박 주스와 아이스크림까지 풀코스로 점심을 먹었다. 오전 내내 타이어 문제로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겠다고 숨 가쁘게 돌아다닌 체팔루 방문을 마치고, 팔레르모로 향했다.
팔레르모(Palermo)에서의 계획은 단순했다. 궁전을 보고, 박물관에 가고, 공연을 보는 것. 시칠리아의 수도답게 문화와 역사가 켜켜이 쌓인 도시를 제대로 경험하는 것.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팔레르모는 지저분했고, 도시 악취는 예상보다 진했다.
도시의 중심에는 8각형 교차로 콰트로 칸티(Quattro Canti)가 있다. ‘네 개의 모퉁이’라는 뜻의 이곳은 17세기에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로, 하루 종일 어느 한 면이라도 햇빛을 받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태양의 극장, 가이드북은 그렇게 불렀다. 분명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던 나는 감탄보다 조급증을 먼저 느꼈다. 어디라도 좋으니 잠깐이라도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을 갖고 싶다는 조급함.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거리 음악가들은 연주를 하고, 마차들은 손님을 기다렸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지키는 완벽한 관광 시스템의 한복판을 지나 발라로 시장으로 향했다. 이른 오후부터 이미 취한 듯 보이는 젊은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몰려다녔다.
평소의 나라면 그 흥에 섞였을까. 그날은 싸구려 술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대도시란 어디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많고, 소음이 과하고, 모든 것이 조금씩 젖어 질척거린다.
차를 세우자마자 “1유로만, 1유로만”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차 관리인인 척 다가오는 사람들. 차를 세워 두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괜히 자리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술에 취한 걸인을 마주하는 기분은 씁쓸했다.
팔레르모에서 은근히 기대했던 곳은 테아트로 마시모(Teatro Massimo)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오페라 극장이자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영화 <대부 3> 에서 알 파치노의 딸이 총격을 당하던 바로 그 계단이 있는 극장이다. 대부>
공연 일정을 확인했지만 맞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내 상태로는 푸치니의 아리아도, 베르디의 화음도, 어떤 음악도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까.
팔레르모에서 나를 위로해 준 것은 오직 자카란다(Jacaranda) 나무였다. 보랏빛 꽃이 만발한 나무들이 거리마다 조용히 서 있었다. 지저분한 거리, 시끄러운 소음, 불쾌한 냄새 속에서도 자카란다는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피어야 할 때 피어나고, 아름다워야 할 때 주저 없이 아름다웠다. 인간이 만든 혼란과는 상관없이···.
여행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하는 착각이 있다. 여행은 원래 즐겁고 의미 있어야 한다는 생각. 실제 여행은 그렇지 않다. 어떤 날은 타이어가 터지고, 어떤 날은 아무 감흥 없는 장소에서 의미 없는 사진을 찍고, 어떤 날은 기대했던 도시가 그저 또 하나의 지저분한 대도시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도 한다.
체팔루와 팔레르모를 지나온 날 일기를 쓰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여행은 기록을 통해서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별로였던 경험과 불쾌했던 순간, 우울했던 감정을 글로 옮기는 동안 그것들은 사후적으로 자리를 찾는다.
카스텔부에노에서 경찰관 마리아를 껴안았던 순간처럼 여행은 가끔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동시에, 평소라면 피했을 공연한 노력을 기울여 실망을 얻도록 만들기도 한다. 실망감 역시 때로는 비싼 값을 치르고 여행이 얻는 것의 일부다.
오늘은 피로했고, 기대는 빗나갔고 도시는 나와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애써 좋은 것 하나를 건져 올렸다. 자카란다 나무. 지저분한 거리와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제 철을 놓치지 않고 피어있던 보랏빛 꽃. 오늘은 그걸로 충분하다.
모든 여행이 감탄으로 끝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실망한 하루 역시 여행의 일부로 남겨도 된다는 것. 체팔루와 팔레르모는 그렇게 향긋한 보라빛으로 기억해 두기로 했다.
☞아란치니(Arancini)=이탈리아 시칠리아 지방의 전통 요리로 라구 소스나 모차렐라 치즈 등을 넣은 밥을 빵가루에 굴려 튀겨낸 일종의 주먹밥 튀김이다. 모양이 작은 오렌지를 닮아 이탈리아어로 작은 오렌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박재희 작가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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