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契)모임
다들 싱붕이라면 알고 있을 그런 모임이다
뭐 다들 들어본적 있지않나
어머니가 계에 들어서 돈을 모았다, 뭐했다 이런이야기
계의 역사는 언제일까?
이건 정확하지가 않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등
무려 20개가 넘는 설들이 존재함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중 매체나 교과서적인 역사 서술에서 '계(契)'는 흔히 미풍양속의 상징으로 그려짐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아 혼례를 치르고, 상(喪)을 당한 이웃을 돕는 따뜻한 공동체의 모습,
즉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전형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그럴리가 있나 ㅋㅋ
조선 후기의 계는 그러한 낭만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음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싹를 틔우기도 전에 기형적으로 성장한 사금융의 정글이었으며,
탐욕과 배신, 그리고 범죄가 횡행하는 복마전 이었음
계가 변질된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경제 상황, 특히 화폐 정책의 대실패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함.
조선 후기, 특히 흥선대원군 집권기는 경복궁 중건과 국방 강화라는 명분 아래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던 시기였음.
이를 충당하기 위해 1866년(고종 3년) 발행된 것이 바로 모두가 들어봤을 법한 당백전임

명목 가치는 상평통보 1문(文)의 100배였으나,
실제 금속 가치는 5~6배에 불과했던 이 화폐는 발행 즉시 시장을 초토화시켰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조선 팔도에 그대로 적용된거지
사람들은 실질 가치가 있는 구 화폐(예: 상평통보)는 땅속 항아리에 묻어두거나 녹여서 그릇을 만들었고,
시장에는 가치가 뻥튀기된 당백전만 넘쳐났음
그 결과는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이겠지?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뛰었음
분석에 따르면 당시 시중 유통 상평통보 총액의 1.5배에 달하는 1,600만 냥의 당백전이 단기간에 풀리면서 화폐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었고,
백성들은 이를 두고 땡전이라 불렀는데, 이는 땡전 한 푼 없다는 말의 어원이 될 정도로 그 폐해는 심각했음
교과서에는 당백전을 그냥 몇줄로 넘겨버리지만 사실상 조선을 끝장내버린 결정적인 사건중 하나임
이러한 화폐 가치의 붕괴는 계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았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두는 것은 바보짓이 된거지
가만히 있으면 돈의 가치가 썩어 문드러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산을 불리기 위해, 혹은 잃어버린 구매력을 만회하기 위해 공격적인 투기 수단을 찾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고수익을 미끼로 한 투기형 계의 등장이었어
참 어디서 많이 본 현상이야 그치?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그의 저서 북학의에서
조선의 빈곤이 상업을 천시하고 무역을 하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고 통렬히 비판했어
그는 중국(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업을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반대로 보자면 당시 조선 내부에서는 정상적인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할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말해주는거지
제대로 된 금융 기관도, 투자처도 없는 조선에서 백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금융 수단은 오직 계뿐이었음
하지만 이 계는 더 이상 상호 부조의 수단이 아니었음
조선후기, 상업의 발달로 물질에 대한 강한 욕망은 제도로도, 형벌로도 규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어
사람들은 돈이 돈을 버는 구조에 눈을 떴고,
이는 곧 다단계 금융 사기와 유사한 형태의 계 조직을 양산하는 토양이 된거지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수령들에게 계가 성행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기니 엄격히 단속하라고 경고했음
그가 우려한 것은 계가 단순한 친목 도모를 넘어, 관아의 수탈을 피하거나
관료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기는 이익 집단으로 변질되는 것이었음
실제로 계주가 관아의 아전과 결탁하여 계원들의 돈을 빼돌리거나,
반대로 계원들이 집단으로 관아에 대항하는 일도 빈번했음
진짜 개판 오분전 이었던거

거기에 식리계라는 계가 존재했는데
식리계는 글자 그대로 이익을 불리는 계였음
계원들이 돈을 모아 목돈을 만든 뒤, 이를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고리대금으로 빌려주어 이자를 챙기는,
사실상 사채업 조합이 된거지. 이자율은 대략 5할이었다고해..
오늘날의 다단계 사기나 폰지 사기의 원형은 조선 후기 계의 운영 방식에서 고스란히 발견됨
현대 뉴스 보도에서 언급된 금융 사기 사례들은 조선시대 계의 폐단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함
가장 전형적인 수법은 고수익을 미끼로 계원들을 모집한 뒤,
앞 번호 계원에게 줄 곗돈을 뒷 번호 계원의 납입금으로 충당하는 돌려막기였음.
계주는 이달에는 누구네 집에 급한 일이 있어 순번을 바꿨다거나
아직 아랫마을 김씨가 돈을 안 냈다는 핑계로 지급을 미루다가,
감당할 수 없는 시점이 오면 짐을 싸서 밤중에 도망가는 야반도주를 감행했음
믿었던 이웃, 혹은 친척이라 여겼던 계주가 사라진 뒤 남겨진 것은 텅 빈 집과 배신감뿐이었음
한 설화에서는 도망간 계주를 기다리다 못해 선 채로 죽어버린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
이는 당시 계 깨짐(파계)이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과 경제적 파산을 안겨주었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이야기지
계가 깨지면 필연적으로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음 단순한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수십 년에 걸친 지루한 소송전으로 비화되기도 했음
조선후기? 진짜 이놈의 계 때문에 얼마나 소송이 많아졌는지,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동방소송지국 이라고 불릴 지경이었어
그 소송의 태반이 계주 잡아주세요, 빌려간 돈 내놔라 였다고 함
당시 목민심서 를 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이렇게 한탄했음
정약용: 내가 수령 노릇 해보니까 말이야,
백성들이 재판 걸어오는 것 중에 제일 골치 아픈개 바로 이놈의 계임..
형제끼리도 계 하다가 원수 되고, 이웃끼리 칼 들고 설치고...
수령들은 제발 정신 차리고 이 사행성 계모임 좀 때려잡아야함
이러다 나라 꼴 망하겠음
19세기 경주 정씨 문중의 파계 소송 사례는 그 복잡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야
이 사건에서 정익환이라는 인물은 계(옛날에는 문중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종계라는 것을 만들었음
제사 비용을 마련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친척끼리의 계모임임) 에서 제명(파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계후입안(양자 입적 관련 문서)을 훔쳐 달아나 자신이 여전히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음
문중 측은 "이미 파계할 때 문서를 훔쳐 달아났으니 그 문서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관아의 행정 처리는 미비했고 호적 기록과 실제 문중의 결정이 불일치하면서 분쟁은 장기화되었음
이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파계 라는 용어의 모호성임 문중 내부적으로는 파계(제명)를 선언했으나,
국가가 공인하는 법적 효력(호적 등)과의 괴리 때문에 사기 행각이 가능했던 것임
이는 조선 후기 사법 시스템이 복잡해지는 경제 분쟁을 효율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사기꾼들이 이러한 법적 허점을 교묘히 악용했음을 보여줌
문중 측 주장
1852년에 이미 파계(제명)되었으므로 권리 없음
정익환이 문서를 훔쳐 달아난 것임 (절도)
정익환 측 주장
호적상 여전히 양자로 등재되어 있으므로 권리 유효
문서를 소지하고 있으므로 내가 적법한 계승자임
문제점
관아의 행정 처리는 미비했고 호적 기록과 실제 문중의 결정이 불일치 되면서
분쟁이 길어졌고 이는 조선 후기 행정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임
경제가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게됨
조선 후기에는 산통계라는 도박형 계가 유행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로또 복권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
방식은 간단했음 계원들이 돈을 내고 가입하면, 그들의 이름이나 번호가 적힌 알(또는 나무 막대)을 통(산통)에 넣고 흔들고
통의 구멍으로 빠져나온 알의 주인이 곗돈을 독식하는 방식이었다.
"산통 깨지다"라는 관용구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
산통이 깨진다는 것은 추첨 과정에서 부정이 발각되어 통을 부숴버리거나, 판 자체가 무산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좆망 상황을 뜻하는 거지
산통계의 변형인 '작백계(作百契)'는 100개의 번호표를 나눠주고 추첨하는 방식이었음
조선후기 주판과 산술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이러한 도박의 정교화를 도왔음
전문 도박사나 사기꾼들은 확률 계산에 어두운 농민들을 상대로
이번엔 무조건 터진다는 식의 감언이설을 늘어놓고 사기를 쳤음
이러한 도박형 계는 생산적인 자본 축적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이었음
누군가 돈을 따면 나머지는 모두 잃는 구조였지
정약용은 이러한 도박 풍조가 농업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민심을 흉흉하게 만든다며 강력한 단속을 주문했으나,
당백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한 방을 노리는 백성들의 욕망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음
도박 빚이나 계 사기로 인한 원한은 십수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깊은 사회적 상처를 남겼음
계가 깨지면 계주가 돈을 들고 도망가거나(야반도주),
아니면 분노한 계원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하는 일이 흔했음
이때 시체를 유기하는 가장 흔한 장소는 마을의 우물이었음
이러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된 조선의 법의학, 즉 무원록의 수사 기법 보자구
"에휴,,또 돈 때문에 살인 났구먼..."
현대의 법의학이 폐 속의 플랑크톤 검출 여부로 익사를 판별한다면, 조선의 검시관(오작인)들은 시체의 자세와 상태를 정밀하게 관찰했음
자살(투신)의 경우: 스스로 뛰어내렸으므로 다리가 아래쪽을 향해 있고, 물을 많이 마셔 배가 부풀어 있으며,
손톱 사이에 우물 벽의 이끼나 흙이 끼어 있다 (살려고 발버둥 친 흔적).
타살(유기)의 경우: 이미 죽은 자를 던졌으므로 머리가 먼저 떨어지거나 자세가 부자연스럽고,
물을 마시지 않아 배가 부르지 않다.
이러한 검시 기록은 당시 계와 관련된 살인 사건이 얼마나 은밀하고 지능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줌
계원들은 계주를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해 우물에 던지기도 하고,
반대로 계주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다른 시체를 구해다 놓기도 했음
돈이 얽힌 곳에는 언제나 치밀한 범죄가 따른거임
실학자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러한 사회적 병폐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어
그는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고 있다며,
사대부들이 팔짱만 끼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지
그의 시각에서 계의 타락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빈곤의 문제였음
생산이 늘지 않고 유통이 막힌 고인 물 같은 경제에서, 백성들이 살길이라곤 남의 돈을 빼먹는 사기 도박이나
고리대금업(변질된 계)밖에 없었던 거라고 봤음
그는 중국과의 통상을 통해 국부를 늘려야만 이러한 서로 잡아먹는경제 구조를 타파할 수 있다고 믿었음
반면 정약용은 관리들의 부패에 초점을 맞췄음
정약용은 지방 수령들에게 계 조직을 경계하라고 조언했음
당시 힘 있는 계 조직은 단순한 친목계를 넘어 지방 관아의 아전들과 결탁해 세금을 포탈하거나,
송사를 유리하게 이끄는 압력 단체로 행사하기도 했음
수령이 부임할 때 계에서 보내오는 선물(뇌물)을 넙죽 받았다가는,
나중에 그 계가 불법을 저질렀을 때 처벌할 명분을 잃게 된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날의 보험성 뇌물 문제를 연상케 함
정약용은 계가 공적인 질서를 허물고 사적인 이익 네트워크로 변질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음
조선 후기의 계 폐단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님
최신 뉴스들이 보여주듯, 오늘날에도 계 형태를 띤 금융 사기는 끊이지 않고 있음
당백전 인플레이션은 가상화폐(코인) 투기 광풍으로,
산통계는 로또와 불법 도박 사이트로,
계주의 야반도주는 다단계 업체의 먹튀로,
파계 소송은 계금 반환 청구 소송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임
여러 법률 상담 사례에서 보듯, 계주가 곗돈을 주지 않는 행위는
여전히 배임죄의 구성 요건을 다투는 치열한 법적 공방의 대상임
조선 시대에 몽둥이를 들고 계주 집을 찾아가던 계원들은 이제 변호사를 대동하고 법원을 찾는거지
화폐 시스템의 붕괴가 신뢰의 붕괴를 낳고, 신뢰의 붕괴가 엽기적인 범죄를 낳는다는
이 냉혹한 인과관계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경고를 던지고 있어
우리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배울건 신뢰가 없는 금융은 도박보다 위험하다는 뼈아픈 교훈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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