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엄마의 가장 눈부셨던 젊은 시절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일이다. 어릴 적엔 어른이 무척 커 보였다. 다 자란 사람답게 몸도, 마음도 느티나무처럼 단단한 그들이 부러웠다. 얼른 나이를 먹고 싶다는 생각도 그 시절에 뿌리를 내렸고, 서른에 막 접어든 지금 역시 그 마음은 여전하다. 엄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어른이었다. 여섯 살 무렵,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조금 언니였고 예뻤다. 나와 닮아 심심한 얼굴에 머리는 똑 단발이었고, 향수 냄새는 늘 짙었다. 자라고 나서야 그게 샤넬 N°5였다는 걸 알았다.
버건디 립, 매캐한 파우더 향, 플레어 진, 가죽 부츠까지, 엄마가 즐기던 2000년대 초반의 지배적인 미학은 어린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돌이켜보면 머리가 크면서 내가 줄곧 ‘성숙하다’고 정의해온 스타일은 결국 엄마의 젊은 날이었다. 지금 1990년대생들이 추억하는 Y2K 무드는 어쩌면 그 시절, 가장 아름다웠던 엄마의 실루엣을 향한 무의식적인 회귀일지도 모른다.
딸 애플 마틴과 함께 영화 〈마티 슈프림〉 뉴욕 프리미어 레드카펫에 참석한 기네스 팰트로
얼마 전 뉴욕에서 열린 영화 〈마티 슈프림〉 프리미어 레드카펫에서 기네스 팰트로와 애플 마틴 모녀는 특별한 순간을 재현했다. 이날 두 사람이 선택한 건 군더더기 없는 블랙 드레스였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사교계에 막 발을 들인 애플 마틴의 드레스였다. 과감하게 파인 네크 라인과 불필요한 장식 없이 몸선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간결한 실루엣은 어딘가 익숙했고, 이유는 분명했다.
드레스는 1996년, 기네스 팰트로가 영화 〈엠마〉 프리미어에서 입었던 캘빈 클라인의 전설적인 맥시 블랙 드레스와 같은 것이었다. 기네스 팰트로를 1990년대 미니멀리즘의 상징의 반열에 올려놓은 바로 그 드레스 말이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 당차게 홀로선 딸을 옆에서 지켜보는 그의 눈에는 무수한 감정이 오가는 듯했다. 쏟아지는 플래시는 자신의 아름다웠던 과거와 딸의 빛나는 현재를 번갈아 비췄다. 그 순간, 또래의 여느 젠지걸과 마찬가지로 마냥 셀피를 즐기던 어여쁜 소녀는 불쑥 자라 어른이 됐다. 믿을 수 없이 빛나던 엄마의 그때, 그 시절로.
도나 카란 2025 봄 컬렉션 캠페인을 축하하는 행사에 나란히 리틀 블랙 드레스를 걸친 채 등장한 케이트 모스와 릴라 모스 모녀.
케이트 모스의 딸 릴라 모스도 엄마의 시간을 섬세히 되짚고 있다. 지난달 2025 영국 패션 어워즈에 릴라 모스는 드라마틱한 페더 트리밍 드레스와 함께 등장했다. 드레스는 1995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프랭크 시나트라의 80번째 생일 파티에서 케이트 모스가 당시 연인이었던 조니 뎁과 함께 레드카펫을 밟을 때 입었던 것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길쭉한 팔다리와 수수께끼 같은 눈동자, 광대를 잔뜩 수놓은 사랑스러운 주근깨마저 케이트 모스를 빼닮은 릴라는 엄마의 아카이브를 꼭꼭 씹어 하나씩 제 것으로 소화해내는 데 놀라울 정도로 능하다.
도나 카란의 2025 봄 컬렉션 캠페인을 기념하며 열린 특별한 행사에서 릴라는 엄마의 유산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리틀 블랙 드레스를 보란 듯이 재해석했다. 매끄럽게 몸을 타고 흐르는 스트랩리스 드레스와 슬릭번 헤어는 케이트 모스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묘하게 새로운 인상을 남겼다. 한때는 엄마의 명성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혹평이 쏟아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릴라는 엄마와 나란히 함께한 투샷에서도 주저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그런가 하면 때때로 모녀의 시간은 동시에 흐르기도 한다. 생 로랑 프로덕션이 선보인 짐 자무쉬의 신작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는 빨간색 하나가 운명의 붉은 실처럼 세 모녀를 단단히 엮는다. 극 중 엄마 역을 맡은 샬럿 램플링과 두 딸을 연기한 케이트 블란쳇, 비키 크립스는 오랜만에 한 집에 모인다. 외투를 벗어든 두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는 이내 미소를 띠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모두 같은 색으로 맞춰 입었네.” 올곧고 단정한 케이트 블란쳇은 셋 중 가장 맑은 빨간색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괄량이 비키 크립스는 짙은 빨간색 티셔츠를, 샬럿 램플링은 생 로랑의 우아한 버건디 코트 드레스를 걸친 채 웃음을 터뜨린다.
오는 길에 차가 망가졌다가, 테이블 위에 둘 꽃을 이리저리 바꿔보다가,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은 한 테이블에 마주 앉는다. 서로 다른 시간을 바삐 건너온 세 모녀의 티타임 위로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맴돈다. 하지만 빨간색은 그들을 단번에 하나로 묶는다. 피는 홍차보다 진하고, 빨간색은 그보다도 더 진하니까. 샬럿 램플링은 이제 그만 가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떠나는 두 딸의 뒷모습을 꽤 오래 바라본다. 딸은 언제쯤 엄마의 버건디를 이해하게 될까. 우리는 엄마가 되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가장 아름다웠던 엄마의 나이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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