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지훈 선임기자 =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자에게 검찰이나 군, 정보기관 등은 권력 유지에 필요한 핵심 장치다. 경제 분야에서도 국세청과 함께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기관이 중앙은행이다. 소위 돈을 찍어내는 발권력이나 금리를 결정하는 권한을 동원해 경기를 띄우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선거에서 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슬로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야말로 국가와 정치의 본질이자 핵심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력과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Fed)의 충돌은 권력자에게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권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한해 국방예산에 맞먹는 규모의 국채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연준이 속 시원하게 기준금리를 내려서 경기도 띄우고 이자비용도 줄여주면 좋으련만 영 말을 듣지 않는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바보, 얼간이, 매번 늦는 사람 등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비난하고 압박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번엔 방법을 바꿔 행동에 나섰다. 연준 청사의 개보수 비용이 예상보다 늘었다며 파월 의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파월이 오는 5월 의장에서 물러나도 연준 이사로 남아 금리정책에 관여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역사에서 중앙은행을 장악하려는 정치권력의 시도는 꾸준히 이어졌다. 중앙은행이 그 시도에 맞서 싸워 독립성을 쟁취한 사례도 있지만 권력에 굴복한 경우도 많다. 무차별적인 화폐 발행으로 물가상승률이 200%를 넘고 경제가 망가진 아르헨티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금리인하 압박으로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았던 튀르키예 등은 중앙은행이 권력에 굴복한 부작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수십 년 전 한국은행 직원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 한은 독립 구호를 외치며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위해 싸웠던 경험이 있다.
갖은 압력에도 파월 의장은 남은 임기 동안 꿋꿋하게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미국 연준의 독립성과 통화정책의 중립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의장을 해임할 수 있는지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연준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임명권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코드가 맞는 차기 의장을 선임해 연준을 자기편으로 만들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벌써 연준 내부에선 금리 동결파와 인하파의 분열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새 연준 의장의 선임 이후다. 파월이 임기가 끝나는 5월까진 버틴다 쳐도 비둘기파의 새 의장이 취임해 금리를 몇 번 내리면 그 후 미국 경제가 어떻게 될지 관심이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정책 여파로 물가가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다면 연준의 새 지도부는 금리 인상으로 물가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연준이 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면 미국 정부는 다가오는 인플레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철저한 자국 이기주의로 무장한 트럼프 행정부는 인플레 대응책을 마련하겠지만, 그로 인한 글로벌 경제와 금융시장의 충격과 비용은 어찌 감당할지 걱정이 앞선다면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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