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에는 여전히 차가운 정적이 흐르고 있지만, 서대문구 통일부 청사의 금고에는 3년 만에 훈풍이 불기 시작했다. 2026년도 총지출 728.0조 원이라는 거대한 재정 지도의 한 구석, 남북협력기금은 굳게 닫혔던 문을 다시 열었다. 지난 12월 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안에서 통일부 소관 남북협력기금 사업비는 1조 23억 원으로 확정되며 마침내 1조 원 선을 회복했다. 이는 전년 대비 25.2%나 폭증한 수치로, 외교·통일 부문 전체 예산이 0.7조 원 순감하는 혹독한 구조조정 속에서도 남북 관계만큼은 대화와 교류의 마중물을 붓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실리적 평화론이 투영된 결과다.
1조 원의 복원: 평화 공존을 위한 재정적 베팅
이번 예산안의 핵심은 남북협력기금의 1조 원대 복원이다. 지난 정부 기간 동안 남북 관계 경색으로 인해 1조 원 아래로 떨어졌던 기금 규모를 다시 끌어올린 것은, 남북 대화 재개 및 교류·협력 활성화에 대비해 관련 재정적 기반을 미리 확충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이번 증액에 대해 남북 대화 재개와 경제협력 기반 조성을 위해 규모를 대폭 확대했다"며 "지속 가능한 남북 평화 공존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 목표"라고 밝혔다.
세부 내역을 들여다보면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한 구호 지원에 6,810억 원, 남북 경제협력에 3,037억 원이 배정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신규 사업은 123억 원이 투입되는 한반도 평화공존센터 건립이다. 이는 과거의 흡수 통일 논의에서 벗어나, 이재명 정부가 제시한 통일 지향의 평화적 두 국가 관계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상징적 공간이 될 전망이다. 또한 엠제트(MZ) 세대를 겨냥한 미래세대 평화·통일 민주시민 인식 확산 사업에도 9.5억 원이 신규 편성되며 통일 담론의 세대교체를 시도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격돌: 이름표를 떼는 전쟁
하지만 1.2조 원이 넘는 통일 예산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격론의 연속이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가장 날 선 공방이 벌어진 지점은 의외로 예산의 명칭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은 예산 소위에서 북한 인권이라는 표현이 포함된 특정 예산 항목의 명칭을 바꿀 것을 강력히 제안했다. 이재정 의원은 북한 인권이라는 용어가 정치적으로 편향되게 사용되어 온 측면이 있다며, 실질적인 인권 개선과 효율적인 예산 집행을 위해 보다 중립적이고 포괄적인 용어로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재정 의원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며, 위원회에서 의결해 주시면 그대로 따르겠다고 답변하며 야당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동영 장관은 이번 예산안에 대해 지난 정부 시기에 형해화됐던 통일부 본연의 기능과 조직을 복원했다며, 강화된 조직 역량을 기반으로 남북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실제로 통일부는 지난 11월 600명 규모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며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진용을 갖춘 상태다.
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러한 기조 변화에 우려를 표했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헌법에 명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만 성급하게 대화의 손길을 내밀며 대규모 예산을 편성하는 것이 자칫 퍼주기 논란을 재점화할 수 있다는 비판이다. 여당 측 한 의원은 남북 협력은 상대가 있는 게임인데, 기금만 늘린다고 평화가 오느냐며 재정 건전성 지표인 국가채무 비율 51.6%를 고려할 때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실리와 명분 사이: 외교 예산의 희생과 평화의 기회비용
남북협력기금의 부활은 외교 부문의 희생이라는 쓰라린 대가를 동반했다. 2026년 예산안에서 외교·통일 분야는 전체 12대 분야 중 유일하게 예산이 감소한 부문이다. 정부는 한미 관세 협상 합의 사항 이행을 위해 대미 통상 프로그램 예산을 1.9조 원 감액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대대적인 칼질을 단행했다. 이렇게 확보된 재원의 일부가 남북협력기금의 증액분으로 흘러 들어간 셈이다.
국회 심의 과정에서는 이러한 자원 배분의 불균형에 대한 지적도 제기되었다. 김건 간사 등 야당 의원들은 한미 원자력 협정이나 관세 대응 등 시급한 외교 현안에 대한 예산이 충분치 않다고 우려한 반면, 여당은 남북 관계 복원이 최고의 안보이자 경제 대책이라며 기금 확충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조국혁신당 김재원 위원은 예산안 토론회에서 과거의 선택적 재정으로 인한 균열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평화가 곧 경제라는 논리로 남북 협력 예산의 필요성을 뒷받침했다.
결국 남북협력기금은 2026년 한국 재정이 선택한 가장 선명한 정치적 이정표다. 728조 원의 거대 예산 기조 속에서 1조 원의 기금을 복원한 것은, 긴장 완화를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내수 성장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는 정부의 승부수다. 하지만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과 북한의 냉담한 태도 속에서 이 1조 원의 올리브 가지가 실질적인 평화의 결실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1조 원이 묻는 평화의 가치
남북협력기금 1조 원의 회복은 단순한 수치상의 복원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대전환을 선포한 사건이다. 외교 예산을 깎고 예비비를 줄여가며 마련한 이 재원은,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싼 비용을 치러서라도 사수해야 할 국가적 자산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국가 부채 비율 50% 돌파라는 엄중한 현실 속에서, 1조 원의 기금이 닫힌 판문점의 빗장을 여는 열쇠가 될지 아니면 다시 한번 허무한 신기루로 남을지는 이제 정동영 장관이 이끄는 통일부의 협상력과 집행의 지혜에 달렸다. 728조 원 예산의 19번째 조각은 우리에게 평화의 가치를 숫자로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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