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총수들의 등기임원 겸직 현황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난해 기준 대기업 오너 총수가 맡은 등기임원직은 총 100개로 집계되며, 과거에 비해 감소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동시에 14개 그룹에서는 총수가 여전히 미등기임원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책임경영 의지와 법적 책임 회피 논란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자산 규모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 가운데 오너가 동일인으로 지정된 49개 그룹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총수가 등기임원으로 등재된 계열사 수는 지난해 총 100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0년 117곳과 비교하면 14.5% 감소한 수치다. 형식적으로 보면 총수들의 과도한 겸직이 다소 완화되는 흐름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여전히 총수 1인이 여러 계열사의 법적 책임을 동시에 지는 구조는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등기임원 여부는 단순한 직함 문제가 아니다. 상법상 등기이사는 회사의 경영에 대한 법적 책임과 의무를 지는 위치에 있으며, 기업의 의사결정에 직접 관여하는 핵심 주체로 간주된다. 이 때문에 총수가 등기임원으로 등재돼 있는지는 책임경영 의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로 여겨져 왔다. 국민연금 등 주요 기관투자자들도 그동안 동일인의 과도한 겸직 문제와 미등기임원 관행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
특히 최근 상법 개정 논의 과정에서 이 같은 문제의식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기업의 지배구조 투명성과 경영 책임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총수들이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법적 책임에서는 한 발 물러서 있는 구조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적으로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분석도 있다. 중대재해 발생 시 등기이사에게 형사 책임이 직접 귀속될 수 있다는 점에서, 총수들이 등기임원직을 부담으로 느끼고 미등기임원 형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회장이나 명예회장, 고문 등의 직함을 유지하면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되, 법적 책임에서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려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조사 결과를 보면 49개 그룹 가운데 23곳에서는 총수가 2곳 이상 계열사에 등기임원으로 중복 등재돼 있다. 이 가운데 6곳은 무려 4곳 이상 계열사에서 동시에 등기임원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총수 1인이 다수 계열사의 주요 의사결정에 직접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이자, 반대로 보면 책임 역시 그만큼 집중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등기임원 겸직 기록을 보인 인물은 부영그룹 회장으로, 지난해 기준 16개 계열사에 이름을 올렸다. 뒤를 이어 SM그룹 회장이 12곳에서 등기임원을 맡고 있었다. 이런 수치는 책임경영을 강조하는 시각에서는 "총수가 직접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적으로 관리가 불가능한 숫자"라는 지적도 동시에 나온다.
기업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등기임원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질적인 경영 책임을 수반하는 자리"라며 "한 사람이 수십 개 계열사의 법적 책임을 동시에 진다는 것은 제도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형식적 책임은 존재하되 실질적 관리와 감독이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미등기임원으로 남아 있는 총수들이 여전히 14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대기업 핵심 그룹을 이끄는 주요 총수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회장이나 총괄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음에도 등기임원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다.
특히 신세계그룹 사례는 논란의 중심에 자주 오르내린다. 이 그룹에서는 오너일가 3명이 모두 회장 직함을 유지하고 있지만, 단 한 명도 등기임원으로 등재돼 있지 않다. 이는 "경영 권한은 공유하면서 법적 책임은 누구도 지지 않는 구조"라는 비판을 낳고 있다.
이 밖에도 DL그룹, 한국앤컴퍼니그룹, DB그룹, 이랜드그룹, 삼천리그룹, 태광그룹, 유진그룹, 하이트진로그룹 등 여러 대기업 총수들이 미등기임원 상태를 유지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대부분 그룹의 상징적 리더이자 실질적인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지만, 법적 책임 구조에서는 한 발 떨어져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를 두고 상반된 해석이 공존한다. 한쪽에서는 "총수가 등기임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며, 내부 통제와 지배구조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편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법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리에 서지 않으면서 경영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제도적 불균형"이라고 비판한다.
최근 ESG 경영과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이 글로벌 투자 기준으로 자리 잡으면서, 총수의 등기임원 여부는 해외 투자자들에게도 중요한 판단 지표로 작용하고 있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기업일수록 지배구조 리스크가 크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등기임원 겸직 축소는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등기임원 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현실은 또 다른 문제로 지적된다. 등기임원 숫자가 줄어든 것이 책임경영 강화 때문인지, 아니면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인지는 기업별로 해석이 갈릴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단순히 등기임원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는 문제를 넘어, 총수가 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고 경영 의사결정 구조가 얼마나 투명하게 작동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형식적인 등기 여부보다 이사회 중심 경영, 독립적인 사외이사 역할 강화, 내부 통제 시스템이 함께 작동해야 진정한 책임경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수의 등기임원 등재 여부는 여전히 상징성이 크다. 기업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사람이 법적 책임 구조 안으로 들어와 있는지 여부는 기업의 지배구조 성숙도를 보여주는 가장 직관적인 지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 결과는 국내 대기업 지배구조가 여전히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겸직 축소와 책임경영 강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미등기임원 관행이 고착화돼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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