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미국의 무역지표가 호전됐다는 평가와 달리, 의약품 산업을 둘러싼 통상 환경은 오히려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관세 발언 하나로 수입 구조가 흔들리고, 제도 변화가 예고 단계에 머물러 있음에도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의약품 산업의 경쟁 축이 연구개발(R&D)을 넘어 공급망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 상황이다.
12일 미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미국의 재화·서비스 무역적자는 294억달러로 200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수입 감소와 수출 증가가 겹치며 무역수지가 개선된 것처럼 보였지만,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일시적 왜곡’으로 해석했다. 금 수출 급증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해외 의약품 100% 관세’ 발언 이후 의약품 수입이 급감한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관세가 현실화되기 전부터 시장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상호관세 위법 여부를 둘러싼 연방대법원 판단을 앞두고 있지만, 산업계는 관세 부담이 완화되기보다 품목별·산업별 압박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더 크게 보고 있다. 상호관세가 제약받더라도 무역확장법 232조나 관세법 338조 등 다른 수단을 통한 관세 부과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약품과 반도체는 이미 국가안보 논리와 결합된 주요 타깃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같은 통상 환경 변화는 기업들의 전략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최근 미국 메릴랜드주에 위치한 GSK의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을 2억8000만달러에 인수하며 미국 내 첫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북미 고객 대응과 함께 관세·공급망 리스크를 동시에 흡수하겠다는 판단이다. 앞서 셀트리온도 일라이 릴리의 미국 공장을 인수하며 총 1조4000억원을 투입한 현지화 전략에 나섰다. SK바이오팜, 롯데바이오로직스 등도 이미 미국 내 CMO 또는 생산시설을 확보했다.
이 흐름은 단순한 비용 절감이나 고객 근접 전략을 넘어선다. 미국이 의약품을 연구·생산·유통 전 주기에 걸쳐 관리하는 경제안보 산업으로 재정의하고 있어서다. 코트라는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규제·약가 정책이 동시에 조정되고 있다고 해석했다.
무역확장법 232조 조사와 원료의약품 전략비축(SAPIR)을 통해 API·중간체·완제의약품뿐 아니라 제조 소모품까지 안보 관리 대상에 포함하는 방향이다. FDA는 데이터 무결성과 추적성을 심사 핵심 기준으로 삼고, 유통 단계에서는 의약품 공급망 보안법(DSCSA)을 통해 전자적 추적을 의무화했다.
문제는 국내 정책 환경과 글로벌 요구 사이의 간극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품 허가 건수는 3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고, 바이오신약·시밀러 허가 기간도 대폭 단축됐다. ‘K바이오 의약산업 대도약 전략’을 통해 수출 확대와 신약 창출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미국 시장에서는 허가 이후 단계, 즉 어디서 만들고 어떤 공급망을 갖췄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자본시장과 기술 흐름은 다시 움직이고 있다. 금리 인하 기대와 글로벌 빅파마의 특허 만료가 맞물리며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IPO와 기술이전 논의도 재개되는 분위기다. 오는 13일 개최되는 JP모건 헬스케어 콘퍼런스를 전후로 글로벌 제약사들의 M&A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이 역시 미국 시장 접근이 용이한 공급망 구조를 갖춘 자산에 쏠릴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기술력만으로는 선택받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이다.
국내 산업 구조를 들여다보면 취약 지점은 더 분명해진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의약품 생산액은 32조8629억원으로 전년 대비 7.3% 늘었고, 수출액도 12조6749억원으로 28.2% 증가하며 무역수지 흑자를 회복했다. 완제의약품과 바이오의약품을 중심으로 외형 성장은 이어졌지만, 원료의약품과 한약재 분야는 여전히 높은 수입 의존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10년간 완제의약품 생산 규모는 확대된 반면, 원료의약품과 한약재는 만성적인 무역적자 구조가 지속되고 있어 산업 성장의 하부를 해외 공급망에 의존하는 양상이 고착화됐다는 평가다. 미국이 원산지와 공급선 구성, 해외 의존도를 시장 접근의 핵심 기준으로 삼는 정책을 강화할수록 이런 구조적 취약성이 비용 문제가 아닌 시장 접근 리스크로 전환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필수의약품과 원료의약품 문제는 더 구조적이다. 항생제·주사제·마취제 등 필수의약품은 수익성이 낮고 규제 부담은 크다. 중소·중견 제약사들은 손실을 감내하며 생산을 유지해 왔지만, 2026년부터 제네릭 약가 인하가 본격화되면 생산 중단 가능성도 거론된다. 정부가 원료의약품 비축과 생산시설 확충에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지만, 업계는 가격 조정 중심의 사후 대응만으로는 공급망 리스크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필수의약품은 수익성은 낮고 규제 부담은 커 시장 논리만으로는 생산을 유지하기 어려운 품목”이라며 “원료 조달 구조가 취약한 상태에서 약가 인하 압력이 더해질 경우 생산 중단과 공급 불안이 반복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약품 공급 불안의 근본 원인은 가격 문제가 아니라 원료 조달 구조에 있다”며 “약가 조정을 통한 사후 보완이 아닌 원료의약품 자급화를 중심으로 한 공급망 강화 전략이 마련돼야 필수의약품 안정 공급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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