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뉴스 김능구 대표는 지난 12월 30일, 이재명 정부 국정기획위원회 기획분과위원을 역임하고 최근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연구를 마치고 돌아온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를 만났다. 안병진 교수는 거시적이고 문명사적인 시각으로 국제 질서를 진단했다.
그는 현재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트럼피즘'이 오히려 진짜 위험한 본질을 가리는 '소극'에 불과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안 교수가 지목한 실체적 위협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지구적 지배자로 등극한 '빅테크 리바이어던'과 그 배후에 깔린 '복고적 기술주의'다. 기술 권력이 근대사회의 기본 원칙인 정교분리를 허물고 중세주의적 세계관으로 회귀하려 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러한 지정학적 격변기에 안 교수는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로 '글로벌 플랫폼 국가'를 제시했다. 미국과 중국 모두 보편적 가치와 신뢰를 잃어버린 지금, 글로벌 사우스를 향해 K-컬처의 영성과 회복탄력성을 담은 새로운 담론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Multiplex Society(다문명 공존 플랫폼)"를 전면에 내걸고, 한국이 단순한 성장 산업을 넘어 세계 문명의 혼성을 주도하는 보편적 가치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트럼피즘 너머의 본질, '지구적 리바이어던' 빅테크의 지배
안 교수는 '트럼피즘 영원론'이라는 결정론적 시각을 경계하며, 정치는 항상 유동적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번 실리콘밸리 방문을 통해 트럼피즘보다 더 위험한 '빅테크의 완벽한 지배 세상'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과거 기업이 국가에 로비하던 모델은 끝났으며, 이제는 미국의 매그니피센트7(M7) 중 한 기업의 규모가 멕시코 정부를 능가할 정도로 기업이 '지구적 지배자'가 된 시대다.
특히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일론 머스크 한마디에 결정했던 사례를 들며 빅테크 권력의 무시무시함을 지적했다. 안 교수는 "진짜 위험한 건 빅테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라고 단언했다. 이는 과거의 도금시대와도 차원이 다른 '지구적 리바이어던'의 등장을 의미하며, 이들이 가진 거대한 영향력이 국가의 공적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는 경고다.
복고적 기술주의의 역습, 근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다
빅테크 지배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일론 머스크, 피터 틸, 알렉스 카프 등이 주도하는 '복고적 기술주의'다. 이들은 정교분리라는 근대사회의 기본 원칙을 허물고 미국을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확신범'들이다. 안 교수는 이를 "미국이 극복했던 중세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라고 지적하며, 이들의 중세주의적·여성 혐오적 성향이 사회 전반에 심각한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흐름은 외교 전략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최근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SS)이 자유주의 유럽을 주요 타격 방향으로 설정하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안 교수는 이들을 '권위주의적 IT'라 부르며, 만약 2028년에 이들이 승리한다면 "디지털 스탈린주의와 권위주의적 기업 기술주의의 충돌"이라는 매우 위험한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념 없는 트럼프와 MAGA 세력의 철저한 이념주의
안 교수는 트럼프를 특정 이념으로 규정하는 학계의 시각을 비판하며, "트럼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이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가문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1초 만에 이념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지만, 문제는 그 이후 MAGA를 주도하는 철저한 이념주의자들이다. 이들은 1·2차 대전 사이의 미국 국가주의자들과 닮아있으며, 백인 민족주의와 보호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는 2028년 대선에서 이들이 다수가 되어 승리할 경우 미국은 역사상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으로 변모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한편, 미국의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로 영성(종교)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점을 꼽았다. 안 교수는 향후 민주당이 회복해야 할 가치 중 하나로 '영성'을 제시하며,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이 국가 운영 원리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과제를 남겼다.
외교·안보의 실사구시적 전환과 다원적 소통의 필요성
안 교수는 정부의 관세 협상에 대해서는 트럼프의 압박 속에서도 선방했다고 높이 평가했으나, 환율 후과와 핵추진잠수함 선택의 실사구시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했다. 그는 저농축 우라늄 문제 제기는 적절했으나 그 이상의 실익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안 교수는 이재명 대통령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전문가들과 정기적으로 소통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그는 "외교특보로 진보의 목소리도 듣지만, 동시에 천영우 수석이나 송민순 전 장관같은 실사구시주의자의 조언도 자주 청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이는 내란으로 무너진 외교 강국을 복원하는 단계를 넘어, 새해에는 한 단계 더 진화된 외교 담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실용주의적 국익 추구를 넘어 국제무대에서 한국만의 독자적인 보편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글로벌 사우스를 향한 K-소프트파워와 '멀티플렉스' 담론
미국과 중국 모두 보편적 신뢰를 잃은 현재의 국제 환경은 중견국 대한민국에 엄청난 기회다. 안 교수는 K-POP이 세계적 인기를 얻는 이유가 마약이나 범죄가 아닌 "인간다운 가치가 풍부하게 전개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K-컬처를 "약한 자들의 존재를 존중해 주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영혼(spirituality)과 회복탄력성의 음악"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러한 소프트파워를 성장 산업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Multiplex Society나 다문명 공존의 플랫폼"과 같은 보편 담론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이 가진 식민지 극복과 경제 강국 도약의 서사는 글로벌 사우스에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안 교수는 이재명 정부가 이러한 문화적·시민사회적 힘을 활용해 전 세계를 상대로 활동할 글로벌 석학위원회 등을 가동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북 관계의 '기적'을 향한 시지프스의 노력과 현상 변경
남북 관계에 대해 안 교수는 '핵 포기 불가론'에 기초한 현상 유지론에 반대했다.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나 베를린 장벽 붕괴의 사례처럼 역사는 기적과도 같은 사건을 통해 진보한다고 보았다. 비록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낮더라도, "역사라는 건 항상 기적을 만드는 과정이기에 시지프스의 바위를 굴리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의 꽉 막힌 '현상 유지'를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현상 변경'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로 문을 닫고 러시아와의 밀착을 강화하고 있지만, 우리 역시 최첨단 국방력을 준비하는 동시에 트럼프라는 "이념주의자가 아닌 기회"를 활용해 바늘 끝같은 틈새라도 끊임없이 두들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중 관계의 낙관적 전망과 초당적 외교 안보 노선
안 교수는 1월 초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의 실용주의 기조와 시진핑 주석의 전술적 필요성이 맞물려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 대통령이 이미 트럼프와 어느 정도 정치 자본을 쌓았기에 한중 관계를 비교적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평가다.
마지막으로 그는 부처 간의 충돌이나 진보·보수 진영의 갈등을 넘어선 초당적 협력을 주문했다. 세상이 급격히 바뀐 만큼 과거의 진보·보수적 해법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안 교수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처럼 이재명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진보와 보수 원로들을 모아놓고 초당적 미래 리포트를 가지고 난상 토론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 안병진 교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국 정치 전문가이자 문명사적 시각으로 정치를 분석하는 정치학자이다. 서강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뉴욕 뉴스쿨 대학(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단순히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기후위기나 AI 등 거대한 문명적 전환기 속에서 민주주의가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특히 미국 대선 분석과 한국 정치의 구조적 변동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예정된 위기' '코로나19, 동향과 전망' '위기의 한국 정치와 공화주의 대안'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 교수로서 미래 세대를 위한 정치 담론 형성과 문명적 대전환에 대비한 국가 전략 수립에 힘쓰고 있다.
다음은 안병진 교수와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MAGA를 기반으로 한 트럼프 2.0 시대가 열렸다. 일찍이 교수님께서는 트럼프 시대에 대해 경고를 많이 해왔고, 이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트럼프 이후에도 트럼프 시대는 계속될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제 질서 변화는 어떻게 보는가.
미국과 영국에도 일부 그런 학자들이 있고, 한국에서 한동안 트럼프 2기에 압도돼서 트럼피즘은 영원하다고 하는 생각들이 있던데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특유의 결정론적 사고방식이다. 미국 역사를 오랫동안 관찰해보면 트럼피즘은 영원하지 않다. 제가 이전부터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얘기해 왔는데, 이후 정치 지형은 또 바뀔 수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만 보면 26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트럼피즘이 영원하다는 결정론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된다. 정치는 항상 유동적이다.
다만 질문하셨던 원래 뜻, 즉 트럼피즘이 가지는 강한 힘이라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저는 이번에 실리콘밸리를 갔던 이유가 트럼피즘보다 더 위험한 게 다가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트럼피즘은 진짜 위험한 본질을 가리는 스펙터클이다. 저는 그냥 소극이라고 본다. 진짜 더 위험한 건 무시무시하고 완벽한 빅테크의 지배 세상이다. 과거에는 저처럼 미국 정치를 가르치는 사람의 교과서가 로비스트 모델이었다. 빅테크, 하다못해 쿠팡 같은 기업이 대관업을 통해 워싱턴에 로비하는 게 전형적인 미국 정치 모델이었다. 그런데 이 모델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이제 갑은 빅테크다. 갑과 을의 관계가 많은 부분에서 바뀌었다.
-말하자면 쿠팡이 을이 아니라 갑이 돼 있다는 말인가.
갑이다. 미국의 매그니피센트7 중 하나의 기업은 멕시코 정부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다. 그 무시무시한 세상은 과거 JP모건과도 다르다. 록펠러와 JP모건이 지배했던 도금시대와도 다르다. 저는 이걸 '신도금시대'라고 부르는 것조차 주저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구적 리바이어던, 지구적 지배자가 기업이기 때문이다. 매그니피센트7.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례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머스크가 결정했던 상황이다. 러시아를 스타링크에서 배제하려고 했을 때 일론 머스크가 "싫은데?"라고 한마디 하자 끝났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카프의 팔란티어 기업이다. 진짜 위험한 건 빅테크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빅테크보다 더 위험한 게 다가오고 있다. 특히 복고주의를 가진 빅테크다. 굉장히 위험하다. 미국의 건국 이슈들은 단점도 있었지만 근대사회를 열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 것이다. 근대사회의 가장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일부 빅테크가 이걸 허물고 있다. 피터 틸, 알렉스 카프 같은 인물들이다. 이 사람들은 확신범들이다. 단순히 젠슨 황처럼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상관없이 기업을 키우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미국을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 기독교주의가 사회 전반에 녹아드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이건 근대사회의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미국이 극복했던 중세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지금 미국의 젊은 여성들은 굉장히 불안해한다. 낙태, 가부장제 문제 때문이다. 빅테크는 여성 기업인이 적은 영역이다. 실리콘밸리는 원래도 그렇다. 이 중세주의적 IT 일부 CEO들은 여성 혐오적 성향을 갖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들은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라는 단순 이분법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이번 미국의 국가안보 전략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됐던 미 국가안보전략(NSS)에서 주요 타격 방향은 EU, 즉 유럽연합이다. 2차 대전에서 대서양 동맹을 기억한다면, 지금 트럼프 진영이 가장 증오하는 세력이 푸틴이나 시진핑이 아니라 자유주의 유럽이라는 건 충격적인 장면이다.
헌팅턴이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들이 보기에는 유럽연합을 지배해 온 자유주의자들이 백인 문명을 파괴하는 존재다. 적그리스도에 가깝다는 세계관이다. 과거 유럽을 구했던 미국은 더 이상 없다. 대서양 동맹의 미국이 아니다. 지금 백악관에는 트럼프보다 더 위험한 인물들이 있다. J.D. 밴스 부통령, 암호화폐와 AI를 주도하는 데이비드 삭스, 그리고 실리콘밸리의 팔란티어 같은 세력이다. 이들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일부 진보 진영에서 중국이 곧 패권을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의 극단적인 복고적 기술주의자들이 당분간 중국과의 경쟁에서 상당한 힘을 가질 것이다. 이들은 권위주의적 IT다. 어떤 점에서는 중국의 권위주의적 IT와도 닮았다. 도플갱어라고나 할까.
만약 민주당이 2028년에 패배한다면, 디지털 스탈린주의와 권위주의적 기업 기술주의의 충돌이 다음 시대의 정신이 될 수 있다. 이 충돌은 제3차 세계대전을 불러올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격돌이다. 이를 제어하는 것이 전 세계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트럼프는 이에 비하면 차라리 소극에 불과하다. 그래서 트럼프를 특정 이념으로 규정했던 학자들이 당황했을 것이다. 일부는 트럼프를 신냉전주의라고 규정하지만, 그건 트럼프를 아직 이해하지 못해서다. 저는 오래전부터 트럼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해 왔다. 이번 시진핑과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중국의 영역을 인정하며 강대국 간 타협을 한 걸 보고 충격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엘브리지 콜비 같은 인물의 영향으로 신냉전을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니다.
트럼프는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과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이념은 1초 만에 바꿀 수 있다. 문제는 트럼프 이후 MAGA를 주도하는 세력이다. 이들은 철저한 이념주의자들이고, 미국 역사에서 비주류였던 이념이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이 흐름은 전간기,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미국 국가주의자들과 닮아있다. 헨리 캐벗 로지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국제연맹을 부정하며 미국 중심의 백인 민족주의와 보호주의를 주장했다. 이 흐름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당시에는 결국 윌슨과 루즈벨트가, 늦었지만 개입주의를 택했고 미국은 1차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제가 좋아하는 처칠의 말이 있다. "미국은 항상 잘못된 선택을 하다가 마지막에 올바른 선택을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다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그들이 2028년 대선에서 이긴다면, 미국은 역사상 한 번도 보지 못한 미국이 될 것이다. 그게 저는 너무 걱정된다. 다만 오해가 없도록 덧붙이면 기독교 자체가 문제라는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극단적 관점을 국가 운영의 원리로 삼으려는 것이다. 미국의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이 패배한 이유 중 하나는 종교(더 넓게는 영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회복해야 할 가치 중 하나는 영성이다. 다만 이건 다음 기회에 더 얘기하겠다.
-관세 협상 때도 어드바이스를 했는가. 후과도 만만치 않다. 환율 문제도 그렇다.
저보다 훨씬 더 프로페셔널한 분들이 잘하신 것으로 안다. 저는 협상 자체는 굉장히 높이 평가한다. 트럼프의 압박은 플라자 합의 때와는 비교도 안 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상당히 선방했다. 다만 환율 후과는 걱정된다. 그리고 핵추진잠수함이 과연 실사구시적인 선택이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천영우 전 수석 및 많은 현실주의 전략가들이 오래전부터 제기했던 저농축을 제기한 것은 아주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그 이상 무엇을 더 얻어낼 수 있었는지는 고민할 지점이다. 내년부터는 외교·안보에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의 조언 그룹과 정기적으로 소통했으면 한다. 저 같으면 외교특보로 진보의 목소리도 듣지만, 동시에 천 수석이나 송민순 전 장관같은 실사구시주의자의 조언도 자주 청하는 방식을 선택하겠다.
-내란으로 무너진 외교 강국의 복원과 정상화가 일정 정도 이 대통령의 여러 외교 활동을 통해 펼쳐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실용주의에 입각한 국익 추구, 이 부분이 외교 국제무대에서 국격을 좀 더 극대화시킬 수 있는 부분으로서는 한계도 있다는 지적을 아까 하셨는데.
일단 그건 이재명 정부 출범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새해를 맞는 지금은 한 단계 더 진화돼야 된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 시기에 포용적 경제, 포용적 민주주의의 화두를 내걸었었다. Inclusive Democracy라고 흔히 서구에서 얘기하는데, 얼마큼 그 담론에 맞게 했는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담론 제기는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가 국제적 환경에 있어서 새로운 담론을 내걸기에 굉장히 좋다, 지금. 어떤 좋은 환경이냐면 글로벌 사우스만 놓고 보면 미국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떨어져 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가 하는 게 이민 문제라든지, 특히 미국의 국익을 위해 지나치게 팔을 비튼다든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인기를 얻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고 중국의 일대일로가 신뢰를 얻었는가? 중국도 보편을 얻지 못했고, 미국도 포용적인 보편을 얻지 못했다. 이건 중견국가인 대한민국에 어마어마한 기회다.
한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잘 이해하셔야 될 게 왜 외국에서 K-POP을 좋아하는가다. 미국의 학부모들이 K-POP 콘서트에 가는 자기 아이들을 말리지 않는다. 왜냐면 마약이나 범죄가 아니라 인간다운 가치가 풍부하게 전개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BTS 등의 K-POP은 굉장히 취약한 우리들의 존재, 약한 자들의 존재를 존중해 주고, 자존감을 회복시켜주는 영혼(spirituality)과 회복탄력성의 음악이다. 고 이어령 선생님이 살아계셨으면 아마 서구 문명이 결핍된 '인'의 가치를 말씀하셨을 것이다. 최근 한국의 K-pop과 K-드라마는 이 보편적 가치에 소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직 정치권에서만 이 소프트파워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저는 이번 국정기획위원회에서 차지호 의원이 굉장히 놀라웠는데, 차 의원은 그걸 이해하고 있더라. 즉, 글로벌 사우스에서 미국과 중국의 신뢰가 떨어져 있다. 저는 한 10년 전에 박노해 시인과 얘기하면서 역시 이분이 탁견이라는 생각을 했던 게, 박 시인이 외국에 나가면 CNN 기자도 못 들어가는 데 들어간다. 왜그러냐면 박 시인 자체가 탁월하기도 하지만, 한국이 가지는 묘한 힘이 있다. 식민지를 겪었는데 세계적 강국이 됐다. 그러면 할 말이 있는 거다. 미국이 얘기하면 일단 글로벌 사우스는 "어? 뭐지? 우리를 가지고 또 신제국주의 하려고 하나?" 이렇게 의심할 수 있다. 그래서 차지호 의원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우리가 의료 영역이 세계적이다. 그러면 글로벌 사우스에 우리가 플랫폼이나 이런 데서 경제적이나 규범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을 해볼 수 있다. 그런 어젠다들을 대한민국이 해볼 수 있다. 그러려면 보편성을 가지는 담론을 전면에 제기해야 된다.
학문적 개념으로는 저 같으면 Multiplex Society나 다문명 공존의 플랫폼을 전면에 내걸겠다, 이는 유연하고 다원적인 문명혼성을 의미한다. 멀티플렉스는 최근 강대국이 주도하는 세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미국의 한 학자가 제기한 개념이다. 그걸 한국이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서구 수준의 종교 갈등이 있는가, 없다. 아직까지는 이민 문제가 심각한 인종주의로 비화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재명 정부가 글로벌 사우스를 상대로,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그러한 글로벌 플랫폼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굉장한 힘을 한국의 시민사회와 문화가 갖고 있다. K-POP이, K-뷰티가, K-민주주의가 이걸 갖고 있는데, 이걸 잘 활용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너무 성장 산업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저는 그래서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신 게 너무 안타깝다. 이어령 선생님 같은 분이 이재명 정부의 글로벌 석학위원회 위원장을 하시면서 전 세계를 상대로 활동하셔야 하는데 그런 원로가 없는 게 안타깝다. 넷플릭스에 미국 거장들 강연 다큐가 올라온 것을 볼 때마다 이어령 선생님이 자꾸만 생각난다.
-내년 4월에 미중 정상회담이 있다. 그래서 그때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지 않겠느냐, 트럼프는 원하고 있다, 그런데 김정은은 "미국이 줄 게 뭐 있냐" 하고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게 우리 남북 관계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저는 결정론적으로 '어차피 북한은 핵을 포기 안 할 것이므로 그냥 현상 유지하자'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제가 한때 쿠바 미사일 위기 덕후로서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책을 낸 적이 있다. 미국의 전문가들 대부분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서 "뭘 해도 안 돼, 수십 년간 해보니까. 그냥 현상 유지하자." 이런 식이었다. '교황이 쿠바를 방문하거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 미국 대통령이 되거나.' 그 말은 그냥 안 된다는 걸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가. 교황이 방문하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됐다. 베를린 장벽은 브레진스키를 비롯한 일부 사람만 예견했지, 많은 경우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질지 몰랐다. 역사라는 건 기적과 같다. 기적을 통해서 사건의 새로운 진리, 알랭 바디우가 말했던 그런 게 역사다. 그래서 너무 결정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라는 건 항상 기적을 만드는 과정이기에 시지프스의 바위를 굴릴 뿐이다. 물론 김정은 입장에서는 과거 하노이 협상과 달리 골대가 옮겨졌다. 그러면 미국한테 더 큰 걸 내놓으라고 할 거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 과연 트럼프 이후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 지금과 같은 틈새가 생길까. 글쎄. 저는 어쨌든 지금의 '현상 유지'를 조금 변화시키는 '현상 변경'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4월에 조금의 움직임은 해볼 수 있겠다. 물론 당장 그렇게 해서 국교 정상화가 되고, 핵을 포기한다는 그런 순진한 기대로 하는 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북과 우리의 관계에서 바늘구멍만한 틈도 없다, 이런 표현을 했다. 그 정도로 지금 꽉 닫혀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 김정은은 이미 우리 대한민국과의 국격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서 자유주의 헌정주의 국가에 대한 극단적 공포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더욱더 문을 닫으려 하고, 벽을 세우려고 그러고, 뭔가 러시아로부터 현상 변경의 무기, 초음속미사일이라든지 핵추진잠수함이라든지 이런 걸 얻으려고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전체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문을 닫고 있는다? 그 현상을 계속 유지한다? 그건 현명하지 않다. 한편으로는 우리도 나름의 국방에 있어서 21세기적인 최첨단, 과거 전투적 재래식 전쟁과는 다른 무기를 끊임없이 준비하는 동시에, 위성이라든지 북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최첨단 정보를 미국과의 협력 속에서 확실하게 확보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늘과 같은 틈새라도 끊임없이 두들길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그 점에서 굉장히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왜냐하면 이념주의자가 아니니까.
-저는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 정책 및 그 행보를 이번 1월 초 한중 정상회담, 거기서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예측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가지는 워낙 실용주의적 기조가 있어 낙관적이다. 그리고 시진핑에게 있어서 한국은 일본과 분리할 전술적 필요가 크다. 이런 점에서 일정 정도 시진핑과 우리가 당분간 합의할 수 있는 요소들은 있다.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와 APEC에서도 그렇고 어느 정도 정치 자본을 쌓았다. 그런 점에서 저는 한중 관계를 비교적 잘 관리해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열렸다고 본다. 상당히 긍정적인 전망을 해 본다.
-최근에 자주파, 동맹파 충돌을 들으셨는데 좋은 현상이라고 이재명 대통령은 말했다. 각자 위치에서 주장하는 것. 그런데 또 통일부하고 외교부가 충돌하고 이런 부분은 국민이 불안할 수 있다. 어떻게 보는가?
제가 스탠퍼드에 있어서 지금 대통령실이나 이런 쪽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씀은 못 드리겠다. 다만 기존 진보 진영의 해법이 그 당시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었다. 그리고 기존의 보수적 해법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지금은 한국의 보수적 학자나 보수적 정치인과 진보적 정치인이 열어놓고 대화해 봤으면 좋겠다. 아직 내용을 보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국회미래연구원이 반갑게도 초당적 외교 안보 노선에 대한 리포트를 냈더라. 제가 왜 아까 외교 안보에 있어서 탁월한 현장을 이해하는 원로를 얘기했냐면, 과거 노무현 대통령처럼 이재명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진보와 보수 원로들을 모아놓고 초당적 미래 리포트를 가지고 난상 토론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
[폴리뉴스 김자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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