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고예인 기자 |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2년 만에 대만에 역전됐다. 인공지능(AI) 열풍에 힘입은 반도체 호황으로 수출과 기업 실적은 회복됐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소득과 성장의 속도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버티게는 했지만 고환율 충격과 성장 둔화가 겹치며 소득 성장은 정체됐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 역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감소 전환’...한국 경제 구조적 환계
각국 통계와 국제기구 추정치를 종합하면 한국의 지난해 1인당 GDP는 약 3만6100달러 수준으로 추산된다. 전년(3만6200달러 안팎)보다 소폭 줄어든 수치다. 한국이 1인당 GDP에서 대만을 앞섰던 것은 2003년(한국 1만5211달러, 대만 1만4041달러) 이후였지만 22년 만에 순위가 다시 뒤집혔다.
반면 대만은 지난해 1인당 GDP가 약 3만8700달러 안팎으로 추산되며 한국을 넘어섰다. 격차 자체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한국의 1인당 GDP가 ‘감소세로 전환됐다’는 점이다. 성장 국면에서 평균 소득이 줄어든 것은 이례적인 현상으로 한국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신호로 해석된다.
역전의 배경에는 성장 둔화와 환율 쇼크가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한국 경제의 실질 성장률은 1% 안팎에 그친 반면 고환율 여파로 달러 기준 명목 GDP와 1인당 GDP가 함께 깎였다. 원화 가치 하락이 수치에 직격탄이 되면서 성장은 했는데도 지표상 소득은 줄어드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 대만은 반도체·환율 ‘쌍끌이 효과’로 성장세
대만은 정반대의 흐름을 보였다. 반도체 수출 호조에 힘입어 지난해 실질 성장률 전망치를 4%대 중반에서 6~7% 수준으로 상향 조정했고 대만 달러 강세까지 겹치며 1인당 GDP를 빠르게 끌어올렸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첨단 공정 투자를 확대하며 글로벌 AI 반도체 수요를 흡수한 점이 성장 지표 개선의 핵심 동력으로 꼽힌다. AI 서버와 고성능 컴퓨팅(HPC) 수요가 급증하는 국면에서 대만 반도체 산업이 ‘직접 수혜’를 누렸다는 분석이다.
◆ 韓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K자형 성장’
한국 역시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수혜를 입고 있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을 2% 수준으로 제시하며 반도체 수출 회복과 설비 투자를 주요 근거로 들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반도체 효과를 제외할 경우 성장률은 1%대 중반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반도체가 성장의 ‘완충재’ 역할은 했지만 소득과 고용, 내수로의 확산력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수출과 기업 이익은 개선됐지만 가계 소득과 체감 경기는 상대적으로 정체돼 ‘반도체 편중 성장’의 한계가 더욱 선명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1인당 GDP는 전체 경제 규모를 인구로 나눈 평균값인 만큼 가계 체감과 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소 전환과 대만 추월은 한국 경제의 ‘속도’와 ‘방향’을 동시에 점검해야 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 잠재성장률 하락, 노동·연금 개혁 지연, 서비스·내수 부문의 생산성 정체가 장기적으로 1인당 소득 증가 속도를 제약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올해 ‘반도체+α’와 체감성장의 시험대
문제는 앞으로의 격차다. 대만 통계 당국은 올해 자국의 1인당 GDP가 4만921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며 3만달러를 넘긴 지 약 5년 만에 4만달러 고지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면 국제통화기금은 한국의 1인당 GDP가 4만달러를 돌파하는 시점을 2028년으로 제시했다. ‘대만 4만달러–한국 3만달러 후반’ 구도가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정부는 반도체 의존도를 완화하기 위해 ‘반도체+α’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방산, 원전, 바이오, 차세대 전력반도체 등으로 성장 축을 넓혀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수출 호황의 성과가 내수와 가계, 지역 경제로 연결되지 않는 한 1인당 GDP 반등이 곧바로 체감 성장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역전은 단순한 국가 간 순위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과실이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며 “반도체가 한국 경제를 버티게 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성장이 국민 개개인의 소득과 삶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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