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이래 최대 규모인 728.0조 원의 2026년도 예산안이 지난 12월 2일 국회의 문턱을 넘었다. 이번 예산안의 가장 거대한 축은 단연 137조 4,949억 원에 달하는 보건복지 분야다. 정부는 민생 안정과 사회 안전망 강화를 전면에 내세웠고, 국회는 심의 과정에서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정부안보다 311억 원을 추가로 얹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숫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공공의료 인프라 예산은 여전히 정쟁의 소용돌이와 자원 배분의 불균형이라는 고질적인 병증을 앓고 있다.
전국 각지의 지방의료원과 필수의료 현장은 고사 직전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정부가 이번 예산에서 지방의료원과 적십자병원의 경영 회복을 위해 170억 원을 한시적으로 상향 지원하기로 했으나, 이는 현장의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728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재정의 바다에서 응급실과 분만실, 소아과를 지키는 비용은 여전히 정치적 타협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셈이다.
19억 원의 전쟁: 공공의대를 둘러싼 평행선
이번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가장 격렬한 전선이 형성된 곳은 이른바 '공공의대 설립 준비를 위한 예산'이었다. 정부안에 포함되었던 공공의료 전문인력 양성 및 지원 예산 39억 원 중 19억 원이 예산결산심사소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삭감되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더불어민주당 박희승 의원은 국회 본회의와 상임위 발언을 통해 여당의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박희승 의원은 국민의힘이 의료대란 이후 지역 의사 부족에 공감하며 서민 코스프레는 다 해놓고 뒤통수를 쳤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동료 의원한테 상의도, 양해도 구하지 않았다며 전쟁을 하자는 건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단순히 19억 원이라는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의료 체계의 구조적 개혁 방향을 두고 여야가 얼마나 깊은 불신의 골을 가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에 대해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은 아직 관련 법이 통과되지 않아 삭감된 것으로 안다며 현재 정부 수정안을 작성 중이며 법이 신속하게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공공의대 설립을 반대해 온 여당의 입장은 완강했다.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로드맵이 없다는 것이 삭감의 명분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의료계의 반발과 보수적 의료 시장 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달빛어린이병원과 헬기 계류장: 미시적 증액의 명암
거대 담론이 충돌하는 사이, 국회는 민생 밀착형이라는 명분 아래 몇몇 지표성 예산을 증액했다. 소아 진료 공백에 대응하기 위해 달빛어린이병원이 설치되지 않은 지역의 소아청소년과 30개소에 야간·휴일 운영비 18억 원을 지원하기로 했고, 중증 외상 거점센터 2개소에 헬기 계류장을 설치하기 위해 45억 원을 신규 반영했다. 또한 10년 이상 경과한 분만 산부인과 12개소의 시설과 장비를 교체하는 데 18억 원을 할당했다.
이러한 증액은 분명 현장의 시급한 필요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소아청소년과 필수의료 체계 구축 지원금 13억 2,000만 원이나 국립중앙의료원 내 정책지원센터 구축비 13억 원 등은 공공의료의 사령탑을 보강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잘게 쪼개진 예산 투입이 근본적인 의료 불균형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진단한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 관계자는 2026년 예산안에 대해 적극적인 재정 운용 방향을 제시한 만큼 증거 기반 성과 관리와 성과 평가를 바탕으로 운영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728조 원이라는 거대 예산이 투입되는 과정에서 인공지능이나 첨단 기술에는 아낌없이 재원이 배정되는 반면, 정작 사람을 살리는 현장의 인건비와 기본 운영비는 이처럼 국회 심의 과정에서 소액 증액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예산 배분의 심각한 왜곡을 시사한다.
지방의료원의 소외와 인공지능의 습격
보건의료 예산의 내부 구조를 뜯어보면 더 당혹스러운 현실이 드러난다. 2026년도 보건복지부 예산 중 사회복지 부문은 10.7% 증가한 반면, 보건 부문은 3.7% 증가에 그쳤다. 이는 8.1%라는 정부 전체 예산 증가율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특히 정부가 국정과제로 강조하는 인공지능 기반 의료 R&D 예산은 30% 이상 폭증했으나, 정작 지역 의료 현장에서 가장 시급한 파견 의료 인력 인건비 예산은 75억 원 수준에 묶여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서미화 의원은 상임위에서 인공지능 단어는 좋지만 인프라가 시급한 상황에서 모든 분야에 인공지능을 붙여 예산을 받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내용 없이 인공지능이라는 명분만으로 예산을 편성하기보다, 의사나 간호사가 없어 문을 닫는 지방 보건소와 의료원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라는 취지다. 실제로 142억 원 정도의 예산만 인건비로 돌렸어도 파견 인력 규모를 200명 이상 확대할 수 있었다는 분석은 728조 원 예산의 비효율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역 간 의료 격차는 단순한 복지의 문제를 넘어 생존권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여야는 국회 심의를 통해 지방의료원 인건비 지원 단가를 한시적으로 상향하기로 합의했으나, 이는 일회성 처방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의사를 지역으로 유인하고 공공의료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구조적 예산 설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소량의 증액분은 깨진 항아리에 물 붓기식 지출이 될 가능성이 크다.
728조 원이 외면한 마지막 비상구
2026년 예산안은 대한민국이 기술 주도의 초혁신경제를 지향하고 있음을 숫자로 선언했다. 하지만 인공지능 반도체와 미래 펀드에 수조 원이 흘러가는 동안, 당장 오늘 밤 아이가 아플 때 달려갈 응급실을 지키는 예산은 국회의 고성과 정치적 거래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통과되었다. 국가채무 비율 51.6%라는 엄중한 현실 속에서 재정의 우선순위는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성과와 산업적 논리에 치우쳐 있다. 박희승 의원이 경고한 뒤통수와 전쟁이라는 표현은, 사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벌어지는 정치권의 무책임한 도박에 대한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728조 원의 거대 예산 중 17번째 조각인 공공의료 예산은, 우리가 첨단 문명을 누리는 대가로 가장 기본적인 생명 안전망을 얼마나 값싸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성적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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