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최병일 칼럼니스트]
당시 환율에 맞춰 계산한다면 차비 1~2번 받으면 한국에서 최저임금 받는 노동자와 비슷한 돈을 받는 거고 4~5번 받으면 한국 대졸 초봉과 비슷한 금액을 벌 수 있다는 얘기다.
면접비가 워낙 많다 보니 취업을 할 생각은 안하고, 면접만 보러 다니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면접비를 후하게 주었던 이유는 기업들이 흑자가 나는데도 일할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D 직종이라서가 아니라 아르바이트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어서 굳이 취직을 하려 들지 않았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집에 돈이 넘쳐나서 취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대기업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중소기업들은 생산직 사원을 구하지 못해서 버블 시대가 지옥 같았다고 한다.
버블 경기가 절정에 이르던 1989년부터 1991년도까지 유효 구인 배율이 1.4 정도를 기록했는데 구직자 1명당 일자리가 1.4개에 달했다는 뜻이다. 당시 20대 연봉이 무려 1000만엔에 달했다. 물론 이 정도 급여는 당시에도 잘나가는 직장인만 받을 수 있었지만 중소 기업에서도 월급 펑펑 올려주었다.
당시 도쿄 길거리엔 벤츠 190E, BMW E30 3시리즈 등 고급 외제차가 돌아다녔고 페라리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국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지방에서도 건설 붐이 일어 보여주기식 토목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100여명이 사는 섬마을에 다리를 2~3개씩 놓았으며 주민 60명이 사는 마을 앞까지 고속도로를 뚫어 버렸다.
당시 자민당과 건설업체, 그리고 지역유지들의 정경유착에 따른 전시성 공사들이었는데 거품이 꺼지고 나서는 유지비가 부담돼 철거되거나 건설사들이 파산하는 곳이 많았고, 무리하게 공사를 밀어붙인 지자체들이 재정에 타격을 입었다.
긴자의 호스티스 중에서는 하루 접대를 해주고 1억엔의 용돈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미국의 자산들이 하나둘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소니는 할리우드 영화사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했고 라이벌인 파나소닉은 유니버설 픽처스를 인수했다. 일본의 부동산 재벌 요코이 히데키가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인수했다.
전세계 억만장자 중 70%가 일본인이었으며 세계 1등 갑부가 세이부 창업자 츠츠미 야스지로였다.
하지만 거품경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부동산 대출을 자제하도록 금융 기관에 통지했고, 감시 구역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규제를 실시했지만 이런 규제로는 미쳐버린 부동산 시장을 잡을 수 없었다.
이 때, 일본 부동산 거품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요인이 외부에서 발생한다.
국제결제은행은 1988년 ‘바젤합의’를 통해 전세계 은행들이 1992년까지 총 위험자산 대비 최소 8%를 자본금으로 늘려 유지해야 한다는 권고 규칙을 만들게 된다. 일명 BIS 자기자본 비율이었다. 이를 통해 1992년까지 전 세계 은행들은 무조건 BIS 자기자본비율을 무조건 8%까지 맞춰야만 했다.
일본 정부는 1989년 3%의 소비세를 신설하면서 동시에 기준금리를 1990년 12월 6%까지 올렸다. 1991년에는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신규 대출 금지), 기존 대출도 LTV(부동산 감정가 대비 대출액)을 200%에서 70%로 제한했다. 급격한 금리인상에 돈을 갚을 능력이 안되는 사람부터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내놓으며 주식과 부동산 자산 가치 하락이 잇달아 발생했다.
은행이 돈을 회수하고, 사람들이 개인 채무를 갚느라 소비가 위축되니 일본은 길고 긴 불황의 터널에 진입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그렇게 시작됐다.
뉴스컬처 최병일 newsculture@nc.press
Copyright ⓒ 뉴스컬처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