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대학의 효시가 된 독일
1830년대 독일 대학은 전문 학과들이 분리되면서 전문성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전문 학술지와 세미나 등 특수한 인프라가 확보되면서 비판적인 연구 풍토가 확립되어가는 시기였다. 과학이 문헌학이나 역사학의 개념을 흡수한 것도 1830년대다. 후발국인 독일이 나폴레옹 치하라는 비참한 상황에서 탈피하기 위해 1 810년 베를린 대학교를 설립하면서 근대 대학(대학 2.0)이 시작됐다.
나폴레옹의 전쟁과 그 이후 나폴레옹이 옹호하는 가치와 그 가치를 모두 부정하는 빈 체제Wiener System의 성립 등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르러 독일 대학은 학과의 분화,세미나 제도, 실험실 등이 생겨나면서 그 뿌리가 단단해졌다.
특히1830년대가 되어서야 근대 대학의 기본적인 틀이 완성됐다.
“학문이 서로 분리되고 연관성을 결여한 특수 분야로 제각각 쪼개진 것은 183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학문은 이제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됐다.”
이 시기에 과학자라는 새로운 집단도 탄생했다.
“과학자라는 용어는 1830년에 가서야 생겼다. 그 세기 말에 그것은 학술지와 대학 그리고 과학단체를 통해 수천 명의 다른 연구자와 연결된 숙련된 전문가를 가리켰다. 그들한테는 자체적인 규칙과 관행 그리고 자원과 어휘가 있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신념과 신념의 싸움이 아니라 가설의 싸움이다. 증명이 안 되면 가설이 폐기되고, 방법론의 표준화와 전임자 연구를 기반으로 삼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과학이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과학이란 잠정적이고 조건적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일 뿐이다. 1840년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독립된 학문 분야가 등장했다.
“1840년에 이르러 자연과학, 물리학, 역사학, 언어학이 독립된 학문 분야로 등장했고 20세기 학문을 지배하게 될 핵심 문제를 만들어냈다.”
독일 학자들이 근대 학문의 이슈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늘날 논문에 사용하는 참고문헌과 인용 등 까다로운 저술방식을 1830년대(자연과학은 1840년대)에 확립했다. 주관적 믿음보다 객관적 사실을 중시하고 상호 비판과 교차 검증에 바탕을 둔 ‘지식의 방법’을 창출한 일은 매우 놀라운 성취였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은 현실 기반 공동체인 대학에서 전문적인 학문, 과학, 연구의 세계를 만들었다.
“(근대 대학은) 전공과 전문지식을 발전시키고, 증거를 수집하고,가설을 세우고, 기존 문헌을 조사하고, 비판적 교환에 참여하고, 동료 검토를 수행하고, 결과물을 발표하고, 결과물을 비교 및 복제하고, 다른 사람의 연구에 공을 돌리며 그걸 인용하고, 학회에 나가고,학술지와 책을 편집하고, 방법론을 개발하고, 연구 기준을 설정 및 강화하고, 위의 모든 것을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사람들의 세계다.”
기존 문헌을 조사하고, 비판적인 의견을 교환하고, 동료의 검토를 받고, 다른 사람의 연구를 인용하고, 학회와 전문지에 발표하고,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이 모든 일들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진화였다. 이로써 인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서 더 나은 진실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권력의 방해도,이념의 편견도, 종교적 신념도 학자들이 제시하는 사실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이 효과는 30여 년이 지난 뒤 조지 엘리엇이 1865년에 발표한 「독일인에 대한 옹호」에 잘 나타나 있다.
“실험을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험을 끝마치려 한다. 연구를 하는 학자라면 끝까지 자신의 연구를 관철시키려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어느 분야든지 독일 서적에 의존하지 않고 진정한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느 누구든 독일인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는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을 전문가로 부를 수없다는 것이 엘리엇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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