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겉보다 중요한 건 작동 방식이다. 정치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고유한 ‘문법’이 존재한다. 법과 제도의 언어, 권력의 계산, 대중의 심리, 미디어 전략과 정치 언어 등이 어떤 타이밍에 움직이며, 무엇을 감추고 드러내는지는 단순한 논쟁 너머의 작동 규칙을 따른다.
〈정치문법〉은 한국 정치의 핵심 이슈와 정국 전개를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닌 정치 구조, 전략, 심리, 제도 작동 방식의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정치를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문법부터 파악하라.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12·3 비상계엄은 상황에 맞지 않는 잘못된 수단”이었다며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의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는 표현까지 붙였고,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더 나아가 전 당원 투표를 거쳐 ‘당명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카드도 꺼냈다.
이 장면이 던지는 정치적 메시지는 간단하다. ‘사과’와 ‘쇄신’이 필요해진 것이다. 사과가 늦어질수록 중도층 이탈과 내부 분열이 커진다는 경고가 이어졌고, 실제로 당내 완충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던 김도읍 정책위 의장이 사퇴하면서 당은 더 흔들렸다.
다만 사과의 타이밍을 두고 진정성에 의문이 남는다. 장 대표의 사과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동안 ‘계엄’ 문제에서 사실상 방어적 태도를 유지해 온 당 대표가 처음으로 공식 사과의 언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선택이 ‘선거’를 향해 설계된 문장이라는 의심도 함께 부른다. 정치에서 사과는 사실의 인정이 아니라, 비용을 계산한 뒤 결정을 내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사과가 덮지 못하는 공백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관계 정리, 윤리위원회 파동, 한동훈 전 대표 징계 논의, 이른바 ‘유튜버 정치’ 논란까지, 사과 직후에도 갈등의 축은 그대로 남아 있다.
말 바뀐 사과, 책임은 남았나
장 대표는 불과 한 달 전, 12·3 계엄 1년을 맞아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라는 취지의 발언으로 논란을 키웠다. 같은 사건을 두고 한 달 만에 “잘못된 수단”으로 언어를 뒤집었다. 정치에서 ‘언어의 전환’은 대개 여론의 압력과 선거의 시간표를 의미한다.
이 전환의 핵심은 비용이다. 사과를 하지 않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이 커졌고, 사과를 했을 때 감당해야 할 비용이 상대적으로 작아졌다는 판단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민심’과 ‘선거’는 그 비용을 계산하는 가장 직접적인 장부다.
그러나 그의 사과는 여전히 방어적이다. “상황에 맞지 않았다”는 표현은 사건을 ‘헌정질서’의 문제로 끌어올리기보다, ‘판단 착오’나 ‘수단 선택’의 문제로 낮춘다. 사과는 했지만 책임의 무게중심을 조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사과의 진정성은 내용만큼 태도에서 확인된다. 장 대표는 기자회견 뒤 질의응답을 하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는 보도도 나왔다. 정치적 사과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질문을 견디는 태도가 필요한데, 절차를 무시하면 사과는 ‘관리된 메시지’로 보이기 쉽다.
결국 남는 것은 책임의 문장이다. “잘못”이라고 말했다면,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그리고 그 잘못을 가능하게 한 권력 관계와 당의 대응 실패를 어디까지 인정하는지가 부연돼야 한다.
당명 교체, 간판만 바뀔까
장 대표가 꺼낸 당명 개정은 가장 눈에 띄는 상징정치다. 당명은 정체성의 간판이고, 간판을 바꾸는 것은 “이제 다른 정당이 되겠다”는 선언으로 읽힌다. ‘윤석열-계엄-탄핵’으로 이어진 기억의 고리를 끊겠다는 것이다.
특히 위기 국면에서 당명 개정은 ‘기억의 리셋’ 효과를 노리는 강한 선택이다. 논쟁의 프레임을 바꾸고, 책임의 시간을 ‘과거’로 밀어내는 데 유리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기의 정당들은 종종 간판을 먼저 바꾼다.
하지만 당명 개정이 곧 새 정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름만 바꾸는 것 아니냐”는 냉소가 붙는 순간, 상징정치는 역효과를 낳는다. 선거를 앞두고 간판 교체가 반복됐던 기억이 유권자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장 대표가 당명과 함께 ‘혁신 패키지’ 즉 청년 의무공천, 2030 기구 상설화, 정책 네트워크 강화, 민생경제 점검회의 등을 붙이는 이유도 분명하다. ‘간판만 교체’로 보이는 위험을 상쇄하려는 방어장치다.
그러나 당명보다 어려운 것은 ‘룰’이다. 공천 기준, 당내 의사결정 구조, 인선의 공정성 같은 핵심 장치가 바뀌지 않으면, 새 이름은 오히려 새 부담이 된다. 바뀐 간판 아래에서 내려지는 결정이 이전과 닮아 있을 때, 국민은 변화가 아니라 반복을 읽는다.
절연 공백, 윤석열은 어디에
이번 사과에서 가장 큰 공백은 ‘윤석열’이라는 이름이다. 장 대표는 “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겠다”고 했지만, 윤 전 대통령과의 명시적 절연을 문장으로 못 박지 않았다. 정치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종종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신호로 읽힌다.
이 공백은 당이 놓인 딜레마를 드러낸다. 한쪽에는 강경 지지층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중도 확장이 있다. 절연을 분명히 하면 내부 결집이 흔들리고, 절연을 흐리면 외연 확장이 막힌다. 당 대표가 그 사이에서 선택하는 건 ‘모호함’이다.
하지만 민심은 대체로 모호함에 관대하지 않다. 특히 계엄이라는 사건은 ‘정치적 해석’ 이전에 ‘헌정의 상식’ 영역에 걸쳐 있다. 절연의 문장을 피하는 순간, 사과는 ‘선거용’이라는 의심을 더 키운다.
당명 개정이 절연의 부담을 우회하는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도 있다. “말로 절연하는 것보다 보이는 변화가 낫다”는 논리다. 그러나 국민이 보고 싶은 변화는 간판이 아니라 관계의 정리다.
정치문법으로 보면 사과의 핵심은 책임 구조에 있다. “잘못된 수단”이라고 규정했다면, 그 수단을 가능하게 했던 권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지까지 제시돼야 사과는 완결된다. 이번 사과가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동훈 징계로 향하는 윤리위의 칼끝
장 대표가 사과를 ‘쇄신’으로 연결한 이 시점에, 국민의힘 내부에서 가장 뜨거운 뇌관은 윤리위원회다. ‘당원게시판’ 논란이 윤리위로 넘어가며 징계 논의가 본격화되는 순간, 당내 갈등은 다시 증폭될 수 있다. 절차와 결론이 곧 계파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사안이 중요한 이유는 한동훈 전 대표 개인의 문제를 넘어, 당의 권력 재배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윤리위가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에 따라 장 대표 체제가 중도 확장의 길로 갈지, 강경 결집의 길로 갈지 결정된다.
징계가 강하면 강경 노선의 신호로 읽힐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징계가 약하거나 유보되면 중도 확장의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윤리위 결론은 ‘누구를 벌하느냐’만이 아니라 ‘어느 방향을 택하느냐’의 문제로 번역된다.
문제는 윤리위의 정당성이다. 위원 구성과 적격성 논란, 명단 유출과 사퇴, 위원장 인선을 둘러싼 반발이 겹치면서 “어떤 결론이 나와도 승복이 어렵다”는 불신이 커지고 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흔들리는 순간, 판단은 정치가 된다.
여기에 ‘유튜버 정치’ 논란까지 겹친다. 고성국 씨와 같은 특정 인물의 입당과 지도부 인선설을 둘러싼 공방은 당이 외연 확장보다 결집을 택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장 대표가 말한 ‘연대’가 중도 확장의 연대인지, 강경 결집의 연대인지, 당 안팎은 인선에서 의중을 읽어낸다.
선거의 쇄신, 룰이 바뀌어야 산다
장 대표의 사과 메시지에는 선거의 시간표가 선명하다. “이기는 선거”의 반복, 청년 의무공천, 정치연대, 공천 룰 조정 등은 모두 지방선거를 향한 설계로 읽힌다. 지지율과 중도 이탈, 지도부 비판이 겹친 상황에서 사과를 통한 쇄신을 꺼낸 이유는 “지면 끝”이라는 절박함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를 향한 쇄신은 동시에 위험하다. 속도가 빠를수록 깊이가 얕아질 수 있고, 급조된 변화는 ‘보여주기’ 프레임에 갇힌다. 반대로 속도가 느리면 ‘말 뿐인 쇄신’이 된다. 쇄신은 속도와 밀도의 균형에서 성패가 갈린다.
그래서 핵심은 룰이다. 당이 진짜 바뀌었다는 증거는 구호가 아니라 기준에서 나온다. 공천의 기준, 비리 전력 배제의 원칙 적용, 전략공천의 투명성, 당원투표의 범위와 조건 같은 구체적 룰이 바뀌어야 한다.
또 하나의 핵심은 일관성이다. 한 달 전엔 “의회 폭거”를 말하고, 한 달 뒤엔 “잘못된 수단”을 말하는 정당이 신뢰를 얻는 방식은 하나뿐이다. 앞으로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기준이 쌓여야 사과가 설득이 된다.
장동혁의 사과와 당명 개정 카드는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뻔한 기술로 끝날 수도 있다. 정치문법에서 사과는 ‘문장’이고 혁신은 ‘문장 뒤에 따르는 제도’다. 지금 국민의힘에 필요한 것은 더 단단하고 진정성 있는 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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