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임준혁 기자 | 미국 정부의 북극 안보쇄빙선 수주 경쟁에서 국내 조선업계가 핀란드 업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이번 수주전에서 한국은 기술력 자체에서 밀렸다기보단 지정학적 요인과 현지 조선소의 건조 역량 부족, 법·제도적 제약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며 나타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술력 대신 구조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만큼 이에 대응한 별도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8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최근 미국 해양경비대는 북극 안보쇄빙선(ASC) 건조계약을 핀란드 라우마마린컨스트럭션(RMC)과 체결했다.
RMC는 오는 2028년까지 2척을 건조해 인도하고 나머지 4척은 관련 기술을 이전받는 미국 볼링거 조선소가 2029년까지 건조하는 방식이다. 계약 금액은 총 32억7000만달러(약 4조7284억원) 규모다.
미 해안경비대가 이번에 발주한 ASC는 핀란드 선박 설계회사 아커악틱이 개발한 다목적 쇄빙선 설계를 기반으로 건조된다. 길이 110m, 폭 24m를 제원으로 하며 두께 약 1m의 얼음을 시속 3노트(5.6㎞)로 돌파할 수 있도록 설계·건조된다. 미 해안경비대 관계자는 “핀란드의 쇄빙선 전문성을 즉시 활용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건조 역량을 미국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선업계에서는 이번 ASC 건조 사업자 선정이 기술력의 열세가 아닌 지정학적 요인과 현지 조선소의 쇄빙선 건조 역량, 미국 내 법·제도적 제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고 있다.
핀란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으로 미국과 안보·국방 분야에서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또 미국 연안을 운항하는 선박은 미국 조선소에서 건조돼야 한다고 규정한 ‘존스법(Jones Act)’에 따라 쇄빙선 역시 현지에서 건조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국내 조선사들이 불리한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외국 조선소에서의 미국 국적 특수선 건조 금지를 명문화한 존스법의 개정 혹은 예외 조항 발효를 가정해도 미국이 당장 한국 조선소에 쇄빙선을 발주할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을 작년 초 이미 내놨다.
한승한 SK증권 연구원은 “미국은 2024년 7월 쇄빙선 설계기술을 보유한 핀란드와 쇄빙선 건조 경험을 보유한 캐나다와 함께 ‘쇄빙선 건조 협력(ICE·Icebreaker Collaboration Efforts)’ 협정을 맺은 바 있기 때문에 아무리 급하더라도 외국 조선소를 이용할 의지가 약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도 “이번 미 해양경비대의 ASC 입찰은 애초에 핀란드 RMC에 건조를 맡기는 쪽으로 결정된 상태에서 진행된 일종의 요식 행위”라고 전했다.
쇄빙선 시장은 2조~3조원 규모로 그리 크지 않지만 북극항로 개척 수요 증가에 힘입어 성장 잠재력이 높다는 분석이다. 선사·조선사 입장에서 쇄빙선 신조는 최소 2년 이상의 오랜 기간이 소요되고 척당 선가도 일반 상선의 2배 가까이 비싸며 다수의 첨단 기술이 집약돼 있어 전략 선종으로 분류된다.
이번 입찰처럼 미 해안경비대의 함정(특수선) 사업에 참여할 경우 후속 발주 물량은 물론 유지·보수·정비(MRO)와 성능 개량 수요까지 기대할 수 있어 수주를 따내면 조선소에 장기 일감 확보와 직결돼 수익성 제고에 도움이 된다.
이에 조선3사는 극지 운항 선박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기술 개발과 사업 준비를 이어왔다. HD현대중공업은 과거 캐나다에서 19만톤급 쇄빙 상선의 선형 성능 검증 시험을 완료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극항로 운항에 필수적인 추진·운용 기술 고도화에 공을 들였다. 또 고기동성과 친환경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차세대 전기 추진기(POD)를 개발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화오션은 지난 2008년부터 극지용 선박 개발을 시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21척의 쇄빙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Arc7 레벨)을 건조한 바 있다. 이를 토대로 지난해 7월 정부 주도의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 사업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한화오션이 건조를 맡은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총 톤수 1만6560톤 규모에 LNG 이중연료 전기추진체계를 탑재하고 1.5m 두께의 얼음을 깨며 나아갈 수 있는 양방향 쇄빙 능력을 가진 PC(Polar Class) 3등급으로 영하 45도의 내한 성능을 갖췄다. 현재 설계 중인 이 선박은 2029년 12월까지 건조를 완료한다는 목표다.
이와 별도로 한화오션 제품전략기술원은 지난해 산업통상부 국책과제인 ‘북극 고위도 연중 운항이 가능한 세계 최고 수준의 PC 2등급 쇄빙선 개발’ 프로젝트도 수주했다. 삼성중공업 역시 러시아의 야말·Arctic LNG2 프로젝트를 통해 쇄빙 LNG 운반선과 쇄빙 셔틀 탱커의 설계·건조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미 해양경비대 ASC 수주에 실패하면서 단순한 건조 기술 및 역량을 넘는 별도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은창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조선업계가 쇄빙 기능이 있는 상선 건조 실적은 있지만 순수한 의미의 쇄빙선(IceBreaker)으로 범위를 한정하면 핀란드와 노르웨이, 캐나다 등의 국가가 설계 기술 및 건조 경험에서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며 “이번 해양경비대의 ASC 입찰도 미국 내 현지화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만큼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을 비롯한 해외 시장 진출이나 특수선 수주 시 배만 잘 짓는 것에서 진일보한 국가 간 안보·경제협력 역량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상선은 가격이나 품질로 건조 사업자가 결정되지만 쇄빙선과 함정 등 특수선은 국가안보와 NATO와 같은 국제 안보 협력체와의 연계가 불가분의 관계”라며 “기업 차원의 접근보다는 정부도 같이 협력하는 전략적 대응 모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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