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김남근 기자]
금융을 설명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
ⓒ ㈜넌그럴자격있어
- 숫자보다 사람을 먼저 본 금융인의 기준
- 현장에서 체득한 한계가 만든 새로운 방향
개인 투자자 시장은 빠르게 커졌지만, 그만큼 정보의 질이 함께 자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자극적인 수익 사례와 단기 성과 중심의 메시지가 넘쳐나는 사이, 투자는 어느새 ‘판단의 과정’보다 ‘결과의 숫자’로 소비되는 영역이 됐다. 현장에서는 상담의 가치마저 금액과 효율에 집중되고, 처음 시장에 들어온 이들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걸러야 하는지조차 배우기 힘든 구조가 반복된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금융을 상품이 아닌 ‘사람의 판단’으로 다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현장에서 모순을 직접 겪고 다른 방식의 해법을 선택해 온 인물, 박동호 ㈜넌그럴자격있어(박곰희TV) 대표가 그 움직임의 중심에 섰다. 이슈메이커를 통해 그의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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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보다 ‘사람’이 먼저
㈜넌그럴자격있어라는 회사명은 설명을 요구하기에 충분하다. 슬로건도, 마케팅 문구도 아니다. 박동호 대표는 “제가 제일 많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어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 만든 문장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문장이 회사의 이름이 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이 말을 회사 이름으로 걸어두면 열심히 살아온 만큼 누군가가 더 자주 그 말을 건네주지 않을까 기대했다고 전한다.
기업명에는 박 대표가 금융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함께 담겨 있다. 누군가는 성과로, 누군가는 자산 규모로 평가받는 업계에서 그는 먼저 ‘당신은 여기까지 올 자격이 있다’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다고 했다. 투자 대상을 고르기 전에, 그 선택을 하게 된 사람의 자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이후 회사가 다루는 콘텐츠와 방향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시장의 분위기가 바뀌고, 자극적인 표현이 더 쉽게 소비되는 환경이 되었지만, 회사 이름만큼은 바꾸지 않기로 했다. 박 대표는 “회사 이름이 바뀌는 순간, 자신이 처음 세웠던 기준도 함께 흔들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넌그럴자격있어’라는 이름은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한 문구라기보다, 매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기준으로 남기고자 합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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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스러웠던 상경의 길, 버티며 배운 세상의 이치
박동호 대표의 출발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다. 경남 마산의 한 시골, 병원이 없어 집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깊은 골짜기에서 자랐던 유년 시절부터 그의 삶은 선택보다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집성촌에서 농사를 짓던 가족은 교육 문제로 도시로 옮겼고, 생계를 위해 아버지는 철도청 기관사가 됐다. 삶의 기반이 바뀌는 과정은 빠르고 거칠었지만, 어린 소년이었던 박 대표는 그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된 그는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택했다. 창원에 있는 대기업 공장 생산직에 들어간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축하를 받으며 시작했지만, 반복되는 라인 작업과 고립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실패처럼 느껴졌던 시기였어요”라며 “부모님에게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다는 생각에, 공장을 나와 홀로 서울로 향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서울에서의 시작은 막연했다. 서울이라는 미지의 세상에 무지했던 그는, 상경 첫날 서울역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강남’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길을 헤맸다. 어렵게 자리를 잡은 곳은 팔을 뻗으면 벽이 닿는 쪽방이었다.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음식점과 술집을 오가며 서빙을 했고, 전단지를 돌렸고, 바에서 일했다. 하루를 채우는 일은 많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깊어지지 않았다. 생활은 억척스럽게 유지됐지만, 마음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리고 우울감과 패배 의식이 함께 찾아왔다. 입대를 앞두고 결국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손에 쥔 돈은 많지 않았지만, 그동안 숨겨왔던 시간을 부모님에게 털어놓았다. 도망처럼 보였던 선택이었지만, 그에게는 처음으로 삶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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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대학생, 성취로 이어진 도전
입대 후 그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처음부터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병 때부터 군 간부에게 공부 시간을 요청했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병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정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때 그가 잡은 책은 수능 교재가 아니라 중학 과정의 EBS 교재였다. 기초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느꼈었기에 늦었다는 조급함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쌓아야 한다’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제대 이후 마주한 현실은 다시 생계였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공부를 이어가려 했지만,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쉽지 않았다. 공부는 연속성을 갖기 어려웠고, 다시 멀어질 것 같은 순간도 많았다. 그때 친구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생활비를 잠시 지원받았고, 친구는 그에게 학원비를 지원해 줬다. 박 대표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 자신보다 훨씬 어린 수험생들이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이 그의 마음에 사명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1년간의 준비 끝에 그는 세종대학교 경영학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캠퍼스의 낭만보다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박 대표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다시 한번 현실로 옮겼다는 성취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덤덤히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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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문을 연 증권사의 벽
금융업으로의 진입은 설계된 계획의 결과라기보다 생활 속에서 들었던 한마디 말에서 시작됐다. 바에서 일하던 시절, 손님들과 나누던 대화 중 “돈 벌려면 증권사로 가야지!”라는 말이 귀에 남았다. 막연한 농담처럼 들렸던 그 문장은 생계를 위해 일터를 전전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다른 선택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금융에 대한 전문 지식보다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부터 고민했다고 했다. 화려한 스펙도, 정제된 성공담도 없었기에 차별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첨삭 없이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써 내려갔다. 공장 생산직을 거쳐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간, 실패처럼 느껴졌던 선택들까지 숨기지 않았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서류 전형을 통과했고,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은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큰 산이 남아있었다. 최종 합격까지는 수십 명이 함께 시작해 현장 평가를 거치며 점점 줄어드는 구조였고, 새벽 출근, 술자리를 포함한 압박의 과정이 이어졌다. 특별한 요령은 없었지만 “여기서 나가면 다시 돌아갈 곳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정신과 체력을 붙잡았고, 그 결과 최종 합격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습니다”라고 전했다. 이후 정식 입사까지 남은 3개월의 시간동안 그는 리서치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섰다. 급여는 최저시급 수준이었지만, 그는 그 시간을 ‘미리 현장을 배우는 기회’로 받아들이며 주어진 기회에 성의를 다했다. 금융을 업으로 삼기로 한 순간부터 결과보다 과정을 먼저 익히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후 그가 금융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기준을 형성하는 중요한 밑바탕이 됐다.
조직과의 충돌, 창업의 카드 꺼내다
증권사에 입사한 뒤 박동호 대표가 가장 먼저 세운 목표는 분명했다. 바로 ‘사장’이었다. 빠른 성과를 내기 위해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몰입은 곧 성과로 이어졌다. 입사 3년 차 무렵 그는 전국 단위 실적 1위라는 첫 결실을 맺었다. 조직이 요구하는 ‘성공한 인재’의 궤도에 정확히 올라서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현실은 단순하지 않았다. 성과의 기준은 명확했지만, 그 기준은 자신의 철학과 맞닿아있지 않았다. 상담과 컨설팅의 우선순위는 고객의 상황이나 고민보다 자산 규모에 따라 달라졌다. 소액 투자자는 상담 시간이 길어질수록 ‘비효율’로 분류됐고, 이러한 구조에 쉽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투자 경험이 적고 평생 모은 돈을 들고 찾아온 고객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 선택이 조직의 논리와 충돌했다는 점이다. 어느 날 그는 4~5천만 원을 들고 찾아온 첫 투자자 상담을 위해 하루 일정을 비웠고,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뒤 “왜 그런 고객에게 시간을 쓰느냐”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한계를 분명하게 느끼게 됐다. 금융이 사람의 판단을 돕는 일이 아니라, 숫자와 효율로 관리되는 사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투자 권유 대행인을 모집해 고객 접점을 넓히는 실험도 했고, 운용사로 자리를 옮기며 ‘규모가 커지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고객 수는 늘었지만, 정작 사람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박 대표는 그 시기를 돌아보며 “금융을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공기업 준비로 방향을 틀어 자격증을 준비하기도 했었어요. 그렇게 현장을 완전히 떠나려던 그 시점에서, 그동안 저 자신이 무엇과 싸워왔는지가 또렷해졌습니다. 금융 그 자체가 아니라, 금융이 전달되는 방식이라는 사실이었죠”라며 “그때부터 투자를 ‘무엇을 사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고, 이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자 했습니다. 창업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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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성장의 동력
창업 이후의 현실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사업을 시작했지만, 매출은 쉽게 나지 않았다. 준비한 콘텐츠와 방향성은 있었지만,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이지 않았다. 박 대표는 이 시기를 과장하지 않는다. 실패했다고 규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결과가 숫자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사업과 잠시 거리를 두는 선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그는 ‘사업과의 이별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월스트리트였다.
출발하기 전, 그는 이미 유튜브 채널을 열어두고 있었다. 다만 그때까지 유튜브는 본격적인 계획의 대상이 아니었다. 강연이나 미팅을 준비하며 담당자에게 보낼 참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몇 개의 영상을 올려둔 정도였다. 출국 당일 기준, 채널 구독자는 30명 남짓이었다. 그런데 2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무심코 유튜브 채널을 다시 확인한 그의 눈에 들어온 숫자가 있었다. 구독자가 300명으로 늘어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던 설명의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닿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한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유튜브는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게 됐다. 그는 이 플랫폼이 자신의 철학과 판단의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매출이 없던 시간과, 사업을 멈춰두고 떠난 여행, 그리고 돌아와 확인한 변화가 겹치면서 박 대표는 우연히 만난 새로운 가능성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이후 그의 활동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의 유튜브 채널인 ‘박곰희TV’에서 택한 방식은 명확했다. 어떤 판단이 가능한지,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부터 차분히 풀어간다. 설명이 길어지고, 반응이 더디더라도 이 기준만큼은 지켜나갔다.
이후 채널이 성장하면서 그의 태도는 더 조심스러워졌다. 유튜브가 개인의 실험 공간을 넘어, 누군가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창구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점부터 ‘무엇을 말할지’보다,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를 더 자주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자극적인 표현이나 확신에 찬 결론이 조회 수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 선택이 남길 결과를 뜬눈으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 대표는 스스로를 ‘유튜버’로 규정하지 않는다. 플랫폼은 도구에 가깝고, 역할은 분명하다고 본다. 금융을 소비되는 정보로 만들지 않고, 판단의 과정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 유튜브는 그렇게 그가 쌓아온 신뢰가 드러난 결과이자, 그 신뢰를 계속해서 시험받는 공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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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대표가 말하는 미래는 구체적인 수치나 목표로 정리되지 않는다. 몇 년 뒤 무엇을 이루겠다는 선언도 없다. 대신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오래 이어갈 것인지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고 말했다. 방향이 맞다면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희망하는 미래의 모습은 비교적 단순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현장을 떠나지 않는 삶이다. 화면 앞, 강연장 등 모든 곳에서 사람들과 직접 마주하며 금융 이야기를 풀어내는 역할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 과정에서 회사의 역할도 분명해졌다. 개인의 영향력에만 기대는 구조가 아니라, 같은 기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설명할 수 있는 틀을 만드는 일이다. 박 대표는 현재 준비 중인 투자자문사로서의 역할과 생산하는 콘텐츠가 자신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특정 인물이 자리를 비워도 같은 철학과 기준이 유지되는 구조를 남기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박 대표는 “넌그럴자격있어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보다, 지금 세운 기준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가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라며 “훗날 시간이 흘러 저를 돌아봤을 때,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동호 대표는 여전히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빠른 답을 내놓지 않는 대신, 설명을 남기는 선택.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길은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어떤 태도로 금융을 다루고 있는지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대한민국 금융의 발전에 작은 씨앗이 되어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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