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사채발달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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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사채발달에 대해서 알아보자

시보드 2026-01-08 00:34:02 신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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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두말하면 입 아프겠지만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에 큰 영향을 끼쳤던 전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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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명나라군은 패악질도 부린것도 있긴있었지만


조선에 큰 영향을 남기고 갔는데


그게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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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경제 였음 


당시 명나라군은 병사 기준으로 한 달 에 1.5냥의 은을 받았는데,


이 은으로 자신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매했고, 이 7년간 조선인들과 거래를 하면서


조선인들에게 화폐 경제 개념을 심어주고 떠난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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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인조 11년에 만들어 진 상평통보(常平通寶)였음


처음 상평통보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백성들은 이 엽전을 녹여 그릇이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쓸 정도로 화폐에 대한 개념도 낮고 못미더워 했지만


몇 번의 부침을 겪고 나자 상평통보는 돈의 지위를 확보하게 됨


이는 조선 사채시장의 팽창으로 이어져버림


여기서 싱붕이들은 분명 질문 할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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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유통됐다고 사채시장이 팽창??? 


이게 무 슨상 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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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총 3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하나하나 집고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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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들어봤을 조선의 거상 임상옥


임상옥도 중인이었다



첫째, 상공업의 팽창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경제관념이 뒤바뀌었다는 것임


여기에는 17세기 이후 등장하는 전문직 중인계층들의 성공도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음


평생 땅만 파다가 인생 끝내는 것보다 장사나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인생 한 방을 꿈꿀 수 있게 된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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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부분이 정말 커


화폐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장리 사업에 뛰어들려면 상당량의 ‘쌀’이나 ‘면포’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창고나 운송수단을 확보하고 있어야만 쌀을 관리할 수 있었음


거기에 쌀이란 화폐는 매년 10% 정도 자연유실된다는 조건까지 달려 있음


이러다 보니 어지간한 재력가가 아닌 이상은 사채업을 벌이기가 쉽지 않았음


그러나 상평통보의 등장은 이런 번거로운 제약조건을 일거에 날려버렸음


구리로 만들어졌기에 녹슬 걱정도 없고, 쥐가 파먹을 걱정도 없었지


게다가 가볍고 휴대가 용이하기 때문에 큰 창고 같은 게 필요치 않았음


일반인이라도 밑천만 조금 있다면 바로 돈놀이를 할 수 있게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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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수요의 확대였음


상공업의 발달과 화폐의 유통으로 화폐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고


그만큼 시장이 확대되었다는 얘기임













이렇게 사채시장이 팽창하다 보니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건 순식간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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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반 완전한 화폐경제로 이행한 조선에서는 너나 할 거 없이 사채놀이에 뛰어들었음


가볍고, 부식되지 않고, 쥐 파먹을 일 없는 엽전으로 인해,


사채는 온 국민의 재테크가 되어 버렸음


여튼 당시 조선에서는 연 5할 이자가 기본이 되었다고함 


사태의 심각성은 당시 상소에서도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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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돈 풀리고 나서부터 사람들 근본 없어지고 물가 개떡상한 거 반박 불가고 지랄났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나물 캐는 할매나 소금 굽는 잼민이들도 하라는 생산 활동은 안 하고


죄다 돈독 올라서 현금 채굴하러 다닙니다


(중략) 금수저 기득권 놈들은 현금 쟁여놓고 흙수저들한테 고리대금업 하는데 이게 개새끼들이 진짜 씹악질이예요


보릿고개 때는 쌀값 비싸니까 100전 풀대출 땡겨야 겨우 쌀 한 말 사먹잖아요? 근데 가을 돼서 갚으려고 보면


쌀값 떡락해서 쌀 서너 말은 팔아야 겨우 원금 100전 만듭니다


여기다 이자까지 계산기 두드려보면, 쌀 한 말 빌려 먹고 나중에 6~7말 토해내는 꼴인데 이게 맞습니까? 


차라리 옛날처럼 현물(쌀)로 빌리고 쌀로 갚으면 이자 2배 선에서 퉁치는데,


화폐로 하니까 서민들 다들 개털리고 설거지 당하는 중이예요


그래서 지금 사람들 다 들고일어나서 화폐 없애자고 난리 났습니다


이미 찍어낸 돈이야 녹일 수 없다 쳐도,


대체 왜 아무 생각 없이 돈 더 찍어내서 인플레 지옥 불반도 만드는 겁니까?"


- 숙종 44년(1718년) 윤8월 3일 정언 유복명의 상소 내용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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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시 왕이었던 숙종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사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식제한령(利息制限令) (현대로 치면 이자 제한법) 을 선포함





야 돌아가는 꼬라지가 심상치가 않은데? 


일단 앞으로 그 어떤 화폐로도 이자율은 연 2할을 넘길 수 없도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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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화폐란, 쌀, 베, 상평통보 모두를 말하는거임 


연 평균 5할의 이자를 말하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강력한 규제라 할 수 있었겠지?


처음에는 숙종의 이자 제한법이 먹히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자 사채 시장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알음알음 5할 이자가 다시 성행하자 숙종은 특단의 두번째 이자제한법을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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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어떤 이자를 막론하고 1년 이상 이자를 못 받게 막아버려





1년이 지난 다음에 이자를 받을 수 있게 법을 바꾸어 버림


이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사채업을 압박하는 수단도 된거지 


1년 이상 이자를 받지 않더라도 버틸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자들만 시장에 남으라는 거였음


즉 개나소나 사채업에 뛰어드는걸 방치할려고 했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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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왕명보다 더 무서운 게 인간의 욕망이었음


조선시대의 가장 확실한 재테크인 사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자놀이를 계속했음


물론, 이자율은 연평균 5할대가 기준이었고


그뒤로도 개인사채는 조선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건국 되어서도 지속되었음


싱붕이들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동네 사채하시던 아줌마나 이런 얘기 들어봤을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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