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정확한 사랑의 실험
엄마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올까? 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엄마라는 존재를 알고 싶어서 묻고, 쓰고, 담은 창작자들을 만났다. 엄마에 관한,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비범한 기록.
어머니의 기억을 붙잡는 일
성승택 감독의 어머니, 윤종생
“다 늙은 사람 찍어가 뭐하노.” 팔순을 넘긴 윤종생 어머니는, 이런저런 포즈를 구하는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시다 이윽고 환하게 웃음 지었다. 아들에게 무심히 밥을 권하던 영화 속 그 모습 그대로였다. 상업영화 촬영감독이자 다큐멘터리 영화를 연출해온 성승택 감독은 이삿짐을 정리하다 어머니의 장롱에서 수 십권의 낡은 노트를 발견한다. 4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간 기록들. 1970년대 잡지 부록이었던 새빨간 꽃그림 가득한 것부터 2000년대 은행에서 얻은 가죽 양장을 덧댄 것까지 가계부 생김새가 각양각색이다. 아들은 가계부를 단서 삼아, 치매를 앓는 어머니의 지난 시간을 좇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큐멘터리 영화 〈어머니의 가계부〉는 ‘가계부의 뚜렷한 기록과 어머니의 흐려지는 기억’을 엮은 시도다.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서울국제노인영화제에서 상영된 이후 추가 촬영을 거쳐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결국 우리는, ‘기억한다는 것’이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가 될 수 있음을, 이들을 통해 보게 된다.
여자로 태어나서 한스럽다
“가계부 사이사이 일기처럼 단상이 쓰인 날들이 있었어요. 앞뒤 장을 넘겨가며 찾아 읽는데 갑자기 ‘여자로 태어나서 한스럽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죠. 아, 엄마도 여자였지, 그날 밤 처음 생각해보게 된 것 같아요. 어떤 충격이었죠. 그러니까 제게 어머니는 뭐든지 능숙하고 열심히 사는 어른이었지, 여자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존재였으니까요.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처음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스물아홉 무렵, 이미 자식이 넷이었죠. ‘남편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마음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쓰지 않고 첫째 대학 입학할 때까지 100만원을 만들고 말 것이다. 이를 악물고 애쓰겠다’. 아버지를 향한 애틋함이나 가난에 대한 원망, 자식에 대한 문장들이 있는데 감당하기에 꽤 어린 나이였죠. 막상 40대가 넘어가면 글이 거의 없어요. 자식이 아프고, 시어머니를 간병하기도 하고, 한 명이 좀 괜찮아지면 또 누가 속 썩이고, 이 생활이 반복됐죠. 가장 안타까웠던 건 어머니가 온전히 좋았던 감정을 쓴 글은 겨우 두 세번 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언젠가 ‘비를 맞으면서 등산하니까 기뻤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죠.”
어머니의 자부심
“누나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삶을 좀 놓아버리신 부분이 있어요. 끝을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신 것 같달까, 그게 안타까웠어요.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산 여성이라는 걸, 이렇게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영화를 찍으며 어머니가 진주 시골에서 매일 초등학교 등교하던 길을 같이 가봤거든요. 가는 길만 8km, 왕복 16km를 어린 꼬마가 매일같이 다녔대요. 6·25가 일어 지각을 했지, 장마로 하천이 막혀도 돌아서 갔다는데, 오늘도 그 얘기를 하실 만큼 자주 떠올리는 기억이시죠. 그렇게 꾸준하고 우직한 마음이 어머니의 삶을 지키지 않았을까. 4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건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가계부는 그냥 가계부가 아닌 거예요. 프라이드와 자존심. 어쩔 수 없이 어려워진 삶의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을 지키는 방식이었죠.”
시절을 통과하며
“1960~70년대 초반 아버지가 회사생활 하실 때 월급이 2만원이던 걸, 지금 환산해보면 8급 공무원 월급과 비슷하더라고요. ‘애기 생일인데 맛있는 걸 사줄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다’ 그런 문장도 써 있고. 우리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시기였죠. 이후 아버지께서 미군 부대 양복점에서 통역 일을 구했는데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한 70년대 후반, 80년대에는 양복을 한 벌 팔면 마진이 만원 남았대요. 제 어린 시절에는 100억 불 수출 탑 같은 게 세워진 것도 기억나네요. 그렇게 차차 집안 살림이 나아지면서 어머니는 아버지 월급 날이면 이 은행, 저 은행에 저축하는 게 재미였대요. 사실 영화는 저희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지만 막상 근현대사 속 우리네 어머니 세대들의 이야기들이지 않을까.”
“어떤 시절이 지나고, 시대는 변해도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는 늘 내가 의지할 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이제는 어머니께 치매가 오면서 제가 챙겨야 되는 시간이 온 거죠. 영화를 찍으며 어머니의 치매 증상을 발견하고, 검사를 받았어요. 일상생활은 가능하시지만 지금도 조금씩 증상은 심해지고 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계부 속 어떤 날들은 또렷이 기억하는 게 놀랍죠. 인간은 누구든 시작과 끝이 있고, 결국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이 사실을 마주하는 게 삶이구나. 덧없을 수 있지만 당연한 진리를 체감하죠. 여전히 집에 사회복지사를 부르는 건 자존심 상해하시지만요. 본인 살림을 스스로 가꿀 수 있는데 왜 부르냐, 용납이 안 되시는 것이겠죠. 어머니는 영화라는 매체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시는 것 같지만, 그냥 즐거워하시는 것 같아요. 저는 계속 어머니의 표정을 지켜보고 있어요.”
흐려지고 선명해지는 기억
“‘행복할 때도, 불행할 때도 없었지. 악착같이 사느라고. 힘든 것도 없었고, 재미있었다.’ 영화 말미에 엄마의 인생은 어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시죠. 자식 넷을 키워내고, 시어머니를 간병하고도 어머니는 그 삶을 부정적으로 생각 안 하시는 그 사실이 저는 매번 놀라운 것 같아요. 현실이 힘들 때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모든 걸 혼자 삭히면서 60년 동안 견디고 반복되는 삶을 이어오신 게 무엇보다 거대하게 느껴져요. 지금도 밥을 먹으면 계속 같은 얘기를 반복하시거든요. 너 밥 조금인데 더 먹어라. 이 얘기를 한 네다섯 번을 하는 거예요.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 순간에도 자식 먹여야 된다는 생각을 하신다는 게, 이따금 짠할 때 있어요. 국에 든 고기를 지금도 아버지랑 저한테 넘기고 본인은 안 드시는 거예요. 근데 솥을 보면 고기가 많아요. 그런데도 계속 양보해요. 본인 입에는 안 들어가고요. 우리들은 그러면 막 화를 내죠. 어머니 드시라고. “
딸, 엄마를 인터뷰하다
홍아란 작가의 어머니, 우정아
지난여름부터 가을까지, 엄마와 딸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세 달간 서로를 마주했다. 1992년생 딸 홍아란 씨와 1965년생 어머니 우정아 씨. 큰 눈망울과 고운 피붓결이 꼭 닮은 두 사람에게 가장 비슷한 점을 묻는 질문에 외모 빼고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소녀 같은 엄마를 자신과 판이한 존재라 여겼던 ‘K-장녀’ 딸은 엄마를 색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계기를 갖게 된다. 딸세포 출판사에서 김은화 대표가 펴낸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를 읽게 된 일이 시작이었다. ‘남의 엄마가 살아온 얘기는 이렇게 사랑스럽고 재밌는데’ 정작 다르다는 이유로 내 엄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모녀 구술생애사 워크숍을 들으며 엄마의 삶을 묻고 듣고 썼다. 90년대생 세 저자가 각자의 엄마를 인터뷰한 에세이 〈니는 딸이니까 니한테만 말하지〉는 그렇게 탄생한 책이다. 두 사람이 책을 펴낸 소회를 털어놓았다. 이들의 말은 서로 다른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랑의 방식임을 보여준다.
질문하는 딸
“성인이 된 후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마음이 복잡했어요. 좋을 때도 있지만 어릴 적 상처가 된 순간이 쌓여 여전히 서운한 점이 느껴질 때도 많았죠. 엄마들이 다 까먹은 걸 딸들은 왜 그렇게 생생히 기억할까요? 엄마와 저는 성향이 참 달라요. 뭐든 직접적으로 말하는 엄마와 달리,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표현하기보단 혼자 일기로 정리하던 딸이었죠. 자식만을 위하는, 희생적인 엄마를 원했던 것 같아요. 언젠가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면서 ‘왜 엄마는 이렇게 안 해줬지’ 이런 생각을 할까봐, 그전에 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한번쯤 마주앉아 삭혀둔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
“구술생애사 워크숍 첫 시간 ‘엄마가 어떤 일을 하셨죠?’ 묻는 질문에 ‘큰 일은 안 하신 것 같은데…’ 얼버무렸거든요. 1980년대 엄마가 젊은 시절에는 백화점과 호텔에서 일하셨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죠. 제가 어린 시절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피부마사지와 화장품 방문 판매를 하셨고요. 엄마는 90년대, 운전면허가 대중화되자 바로 면허를 따고 차를 몰았어요. 제 나이보다 어릴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용감하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살았단 걸 그때 깨닫게 됐어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엄마가 살아온 시간들이 퍼즐처럼 맞춰졌죠.”
“‘예쁜 모직 코트를 입고 사진 찍은 게 기억나’, ‘그때 새 수영복을 입었어’ 어떻게 모든 기억이 다 옷일까. 인터뷰 첫날 같이 옛날 앨범을 펼쳐 보면서 이건 언제야, 누구야, 어디야, 묻는 데에서 시작했죠. 엄마가 옷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어릴 적부터 좋아해왔는지 몰랐어요. 항상 하던 말이 ‘나는 너네들 제일 예쁘고 좋은 옷만 입혔어’셨죠. 그 말보다 다정한 표현을 원했는데 말이죠. 북토크에서 어느 독자분이 엄마는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의 방식을 딸에게 전한대요. 그렇게 옷을 좋아하는 엄마는 제일 예쁜 옷을 입고 자라고 싶었을 텐데. 이젠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 표현이었다는 걸 알아요.”
“엄마의 삶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엄마가 어떤 말을 하면 늘 제 감정과 동일시했어요. 아빠에게 받은 상처를 떠올릴 때 엄마가 슬프면 나도 슬프고, 아프면 나도 아프고. 엄마의 감정은 힘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 같았죠. 이제는 ‘지금 엄마가 힘드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지? 이건 내가 할 수 없는 거네.’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됐어요. 이따금 사는 일이 거대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마다 엄마의 용기 있는 과거를 기억하게 될 것 같고요. 구술생애사 작업을 하며 엄마는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걸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 점이 저와 참 비슷해요. 재즈댄스를 배우는 엄마와 주짓수를 배우는 나. 주위에서 아무리 다친다고 말려도, 호기심이 일어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하는 행동력에서 ‘나랑 엄마 진짜 닮았네’ 싶어요.”
대답하는 엄마
“우리 딸은 내색을 안 하는 편이에요. 저는 막내로 커서 나이를 먹어도 애 같은 면이 있어요. 저를 마냥 받아주고 예뻐해주고 보호받는 걸 좋아하는데, 딸은 그럴 때 언니처럼 ‘엄마, 이렇게 저렇게 해’ 하면서 다독거려주죠. 마음이 넓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친구는 경쟁자야’ 딸이 초등학생 무렵 제가 그런 말을 했대요. 당연히 기억도 안 났죠.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지금 같았으면 좀 더 다정하게 대했을 텐데. 매일 늦게 들어오는 남편, 하루 종일 혼자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참 없을 때였어요. 되게 미안하더라고요, 엄마가 돼서 더 성숙하게 대해주지 못했던 것들이요. 엄마도 처음이라 그랬다고 했죠.”
“아무리 모녀 사이여도 서로 필요한 것만 얘기하지, 딸이 이런 시간을 마련해준다는 게 기뻤어요. 막상 책이 나오고선 한 두세 장 읽고는 못 읽겠더라고요. 제 모든 게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죠. 마음도 되게 막 이상하고, 저릿하다고 해야 되나. 한동안 못 읽었어요. 그 감정을 얘기했더니 ‘다른 엄마들도 다 그랬대’ 하는 거예요. 용기내 끝까지 읽었죠. 지어낸 것도 아니고, 내 삶일 뿐이더라고요. 딸 덕분에 북토크도 하고, 이렇게 촬영도 하는 지금은 너무 자랑스러워요. 카카오톡 프로필에도 책 사진을 올려놨거든요.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온 내 자신이 대견스러워요.”
“딸에게 바라는 점? 없어요. 딱 하나, 딸이 애아빠를 닮아 검소한 스타일이거든요. 저는 중고차를 살 때도 그렇고, 살 건 사고 할 건 하는 스타일이에요. 애아빠가 10원 한 장 안 보태줬지만 제가 일한 돈으로 샀죠. 움켜쥐고 있으면 뭐 해. 성숙한 딸이 자기를 위한 삶을 살았으면 해요.”
북토크에서 어느 독자분이 엄마는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의 방식을 딸에게 전한대요. 그렇게 옷을 좋아하는 엄마는 제일 예쁜 옷을 입고 자라고 싶었을 텐데. 이젠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 표현이었다는 걸 알아요.
다섯 번째 방을 찾아서
전찬영 감독의 어머니, 김효정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 ‘자기만의 방’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하지만 어쩐지 어머니 세대와 이 단어를 중첩시키면, 그저 자식들의 독립으로 인해 생기는 수순일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다. 재작년 각종 영화제와 독립영화 신에서 주목받은 〈다섯 번째 방〉은 엄마의 독립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주체적이고 지난한 과정 끝에 쟁취되는 것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딸 전찬영 감독은 가족 심리상담사인 엄마 김효정 씨가 가정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된 공간을 찾아나서고, 시어머니와 30여 년이 넘게 살아온 집을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5년 동안 촬영했다. 단지 관찰자의 시선에서 엄마의 삶을 바라보지 않고, 한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50대인 한 여성의 독립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시각이 담겨 있다. 독립 이후 모녀의 삶은 어떻게 지속되고 있을까? 각자의 삶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이들은 어느 때보다 빛났다.
나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효정 “남편이 오빠 친구다 보니까 대학생이 되고 나서 만나기 시작했어요. 스물넷 졸업하자마자 일찍 주부가 됐죠. 그렇게 결혼생활을 하고, 남편의 소파 사업을 돕다가 사업이 어려워지고 나서 뒤늦게 처음으로 내 꿈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됐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뭘까? 1년 동안 평생교육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상담 분야에 눈이 계속 가는 거예요. 잘할 수 있겠다는 호기심도 들고, 미술치료학과로 대학원을 가게 됐죠. 세 아이를 키울 때에도 같이 그림 그리고, 물놀이하고 놀아주는 걸 참 잘했거든요. 결혼하면 당연히 시어른 모시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엄마도 그렇게 사셨고. 당연한 줄 알았죠. 가장이 되고 나서 참 억척같이 일하고, 살림하고 살았어요. 아파도 병원 갈 시간 없고, 일만 하고.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면서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죠.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여성의 문제라고요. 우리 윗세대 어머니들도 그 속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희생하는지조차 모르고 살고, 아래 세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그런 거죠. 저 또한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을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려고 독립을 하게 됐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공간이 필요한데, 그마저도 남편이 침해하는 거예요. 어느 순간 애들만 보면 그 얘기를 꺼내니 딸들이 ‘엄마는 고장난 라디오 같다’ 그랬어요. 상담사이면서도 나보고 상담 받으러 가라고. 해소되지도 않고, 지워지지도 않는 감정들이 속에서 올라와서 힘든 얘기를 꺼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내게는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존중받으면서 살고 싶다’. 애쓰면서 용기를 낸 거죠.”
전찬영 처음엔 엄마의 독립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고, 그저 가족의 일상을 촬영했어요. 문득 ‘나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엄마가 말하는 게 제 마음에 오래 남았죠. 엄마가 힘들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항상 우리를 돌봐주는 사람, 집안일을 해 주는 사람,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주는 사람. 이 사실이 너무 당연해서 엄마도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될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거예요. 그 현실이 슬펐고요. 사실 마음 한구석에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삶이 혹시 내 미래가 되면 어떡하지’ 생각을 했었거든요. 가족은 각자 분리된 삶을 살지만, 혹시 나도 가정을 꾸리면 그런 삶이 반복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있었고요. 그 마음 때문에 계속 카메라를 들게 된 것 같아요. 하루 종일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게, 영화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럼 내가 해보자, 이런 마음.
독립 분투기를 찍다
김효정 “딸을 내가 보살펴야 되는 대상으로만 바라봤는데 어느 날 ‘엄마를 내가 보살펴줄 거야’라고 얘기하더라고요. 다 커서 이제 이런 말도 하네, 신선했어요. 반가운 마음에 시작했는데 막상 카메라 들고 있는 게 부담도 되고, 언제 끝날지 싶었죠. 하는 대로 놔둬보자, 같은 생각이었는데 가족의 갈등을 찍다 보니 막상 촬영 중에 딸이 고통스러워하고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었어요. 한동안 카메라를 못 들기도 하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더 열렸죠. 저도 상담을 하다 보니, 가족이 삶에 깊이 들어간다는 시도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끊임없이 다가오길래 완전 승복을 했죠. 제 생각보다 훨씬 민감하게 제 삶 안으로 들어오고, 알고 싶어하는 게 느껴졌어요. 자식이라도 그런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요. 끝까지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어느 순간에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 별 감각이 없어졌어요.”
전찬영 “사람이 좀 미칠 때가 있나 봐요.(웃음) 누군가의 슬픔을 영화화한다는 게, 감독으로서도 딸로서도 과연 괜찮은 일일지 영화를 만드는 내내 생각했어요. 한편으론 ‘엄마가 독립을 안 하면 영화는 어떡하지?’ 감독으로서의 걱정도 있었죠. 반면 딸로서는 ‘엄마가 독립하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지?’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두 가지 고민을 계속 안고 있다가 집에 엄청난 빙하기가 찾아왔어요. 그때는 잠시 엄마가 독립하는 과정을 지켜봤어요. 남동생도 독립하게 되고, 엄마의 독립이 가족 개개인의 정서적, 물리적 독립으로 이어지더라고요. 결국 이 가족이 엄마의 너무나 큰 희생으로 불안정하게 지탱되어 있었던 걸 깨달았죠.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평화가 과연 온전한 평화일까. 한 명에게 많은 책임이 지워져 있는 구조는 옳지 않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막상 독립을 하고 나서는 엄마는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자 좋은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혼자 산 기간이 긴 저와 달리 엄마는 평생 혼자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혼자 살 때 처리해야 하는 것들을 전혀 모르고 어려워하는 엄마를 보고 그때 엄마와의 관계가 전복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느 날 통화를 하다가 엄마가 ‘내가 이 독립을 할 수 있게 된 건 네 덕분이다’라고 말하신 게 아직도 기억이 나요. 나 혼자 고군분투해서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힘이 엄마에게도 닿았구나, 내 마음을 이해받았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엄마라는 사람, 딸이라는 사람
김효정 “성격이 되게 다르거든요. 저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무한대이고 관계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우리 딸은 그 관계 속에서 민감도가 높은 친구예요. 감수성이 많고 섬세하고요. 때로는 그 풍부한 감정 때문에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고, 때로는 햇볕만 있는 것처럼 에너지를 막 쓸 때도 있어요. 나랑 참 많이 다르구나, 싶지만 그런 섬세함이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그래도 비슷한 건 그래도 꾸준히 해내고자 하는 마음!”
전찬영 “김효정이라는 사람은 타인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죠. 그릇이나 여유가 있어야 타인을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그런 조건 없이도 누군가에게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나의 엄마가 아니어도, 우리가 그렇게 이어지지 않았어도 다가왔을 것 같다는 느낌이 있죠. 그리고 굉장히 마음이 크고 단단한 사람. 독립이 그랬듯이 마음먹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떻게든 해내는 걸 제가 옆에서 봤으니까요.”
영화 이후의 삶
전찬영 “아빠 집도, 엄마 집도 생기니 자식으로 챙겨야 될 게 많아졌어요.(웃음) 원래는 한 집에 가서 밥 얻어 먹고 오면 끝이었는데, 이제는 둘 다 챙겨야 하니 그 부분이 쉽지 않아요. 아직도 아빠나 할머니는 엄마의 독립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니예요. 항상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씩 벽을 느끼지만 그런 차이도 이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요. 각자의 시간이 다르니까. 영화를 찍고, 엄마의 삶을 기억한다는 사실이 좋아요. 엄마만 알고 있던 그런 힘듦을 다른 가족 구성원이 알게 되고, 한번 물어주고 알아주는 노력이 엄마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을 해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큼 큰 감동이 없는 것 같아요. 저에겐 그게 중요했거든요. 다큐멘터리를 하는 이유도 그런 거예요.”
김효정 “독립한 지 4년, 이제 진정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인생은 ‘독립 시작. 우리는 행복해!’ 이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경제적으로 나를 책임져야 하고, 집세도 내야 하고, 노년의 나를 혼자 돌봐야 하고. ‘내 선택에 대해 감당해야 될 몫이 이런 거였구나’ 현실적으로 느끼는 것들도 많았죠. 그러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내가 나를 위해 온전히 보내는, 이런 시간의 축적이 너무 신기하고 좋아요. 찜질방도 자주 가고, 그림도 배우러 다니고, 상담도 다니기도 하고, 병원도 열심히 다니죠.(웃음) 이렇게 살 수도 있었구나. 계속 그대로 지냈다면 상상도 못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Copyright ⓒ 바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