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데이터에 중력이 생긴걸까?
왜 2025년 미국시장은 구름 대신 땅을 선택했을까?
2025년 뉴욕 증시는 겉보기에 평온한 호황을 누렸다. S&P 500 지수는 연간 약 17%에서 20%에 달하는 견조한 수익을 기록하며 3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시장의 모든 자본을 빨아들이는 동안, 승자와 패자의 간극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이 기묘한 불평등의 정점에는 약 300%에 육박하는 수익률로 금메달을 목에 건 저장 장치 거인 '웨스턴 디지털(Western Digital)' 승자와, 한때 광고 기술의 총아였으나 주가가 66% 이상 증발하며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든 '더 트레이드 데스크(The Trade Desk)' 패자가 양극단 지점에 대조적으로 서 있다.
★웨스턴 디지털(Western Digital, WD)은 미국의 대표적인 데이터 스토리지(저장) 전문 기업으로,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HDD(클라우드·데이터센터용 대용량 제품)와 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 SSD(소비자·기업용)를 주력으로 생산한다. 1970년 제너럴 디지털로 설립된 후 1971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되었으며, 초기에는 반도체와 컨트롤러 칩을 제조했다. 1980년대부터 HDD 사업에 본격 진출해 세계 최대 HDD 업체가 됐다. 2016년 샌디스크 인수로 NAND 플래시 사업을 확대했다. 2023년 HDD와 플래시 사업을 분할(SanDisk→플래시, WD→HDD 집중) 발표, 2025년 완료 예정으로 구조조정 중이다. 한국 지사는 2002년 설립, 삼성전기와 협력하고 있다.
★더 트레이드 데스크(The Trade Desk)는 디지털 광고 기술(AdTech) 분야의 선도 기업으로, 광고주가 실시간으로 광고를 구매·최적화할 수 있는 DSP(Demand Side Platform)를 제공한다다. 2009년 제프 그린(Jeff Green)과 데이비드 피클스(David Pickles)가 캘리포니아 벤추라에서 설립했다. 제프 그린은 이전 AdECN을 Microsoft에 매각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적 광고 플랫폼을 구축, 2016년 나스닥 상장(TTD) 후 급성장했다. 클라우드 기반 플랫폼으로 비디오·디스플레이·오디오·CTV 등 옴니채널 광고를 지원하며, AI 엔진 Koa·Kokai로 초당 수백만 입찰을 분석한다. 구글·메타와 달리 인벤토리 미보유로 투명성을 강조, 95% 이상 고객 유지율을 자랑하고 있다.
이들의 엇갈린 운명은 2026년 디지털 경제의 가치 사슬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예고 지표다.
지난 10년간 시장은 디지털이라는 '보이지 않는 서비스와 알고리즘'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하지만 2025년은 디지털에 숨죽이고 살던 하드웨어의 복수가 시작된 한해였다. 데이터를 학습하고 추론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공간, 즉 저장 장치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석유'로 급부상했기 때문이다. 반면 복잡한 광고 중개 수수료에 기대어 성장했던 플랫폼 기업들은 거대 기술 기업(빅테크)들이 직접 인프라를 무기로 시장에 진입하자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데이터의 물리적 승리: 웨스턴 디지털의 귀환
웨스턴 디지털의 부활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2024년 말까지 이 기업은 변동성이 큰 플래시 메모리와 성장이 정체된 하드디스크(HDD) 사업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는 '무거운 거인'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2025년 2월, 샌디스크(SanDisk)와의 분사를 완료하며 순수 플레이 하드디스크 기업으로 재탄생하자 시장의 시각은 180도 바뀌었다. 투자자들은 이제 웨스턴 디지털을 구식 하드웨어 제조사가 아니라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의 필수 인프라 공급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웨스턴 디지털의 주가는 2024년 말 52달러(약 6만 7000원) 수준에서 2025년 말 180달러(약 23만 4000원)까지 수직 상승했다. 이러한 폭등의 배경에는 인공지능 데이터 사이클이 있다. 인공지능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를 저장할 물리적 공간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특히 고용량 기업용 하드디스크 시장에서 웨스턴 디지털은 약 48%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시장을 지배했다.
웨스턴 디지털의 최고경영자 어빙 탄(Irving Tan·55)은 2025년 투자자의 날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 혁명은 저장 장치가 데이터 중심 경제의 기반이며, 하드디스크 드라이브가 그 중추임을 명확히 했다. 클라우드 데이터의 80%가 여전히 하드디스크에 저장된다. 우리는 최고의 규모 경제를 제공함으로써 인공지능 시대를 가능하게 한다."
실제 웨스턴 디지털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아마존, 구글, 메타, 테슬라,애플 등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7'으로 불리는 하이퍼스케일러 고객들로부터 2026년 전체 물량에 대한 확정 주문을 이미 확보했다. 한 고객사는 2027년 물량까지 선점한 상태다.
재무 성과도 눈부셨다. 2025년 회계연도 전체 매출은 95억 2000만 달러(약 12조 3700억 원)로 전년 대비 51% 급증했다. 특히 비 일반회계기준(non-GAAP) 매출 총이익률은 과거 20%대에서 41.3%까지 치솟았다. 최고재무책임자 크리스 세네사엘(Kris Sennesael)은 "부채를 26억 달러(약 3조 3800억 원)나 줄였고,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재개할 만큼 현금 창출력이 강력해졌다"라고 자신했다. 시장은 더 이상 이 기업을 경기 순환형 굴뚝 산업으로 보지 않았다. 대신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공장을 가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부품사로 대우했다.
중립성의 딜레마: 아마존이라는 거대한 파도
반면 트레이드 데스크의 2025년은 잔혹했다. 한때 구글의 독점에 맞서 개방형 인터넷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이 기업은 2025년 한 해에만 주가가 66.2% 하락했다. 시가총액은 700억 달러(약 91조 원)에서 180억 달러(약 23조 4000억 원)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2024년 63%의 수익률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같은 트레이드 데스크의 추락은 아마존 때문이었다.
아마존이 자사의 광고 구매 플랫폼(DSP) 수수료를 주요 광고주들에게 파격적으로 매출의 1% 수준까지 낮추는 가격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통상적으로 광고주에게 12%에서 15%의 수수료를 받아온 트레이드 데스크에 이는 사형 선고와 같았다. 아마존은 프라임 비디오와 이커머스라는 강력한 자체 매체(인벤토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비스 수수료를 포기하더라도 광고 판매 수익으로 이를 메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자체 매체가 없는 트레이드 데스크는 수수료가 곧 생존이라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었다.
트레이드 데스크의 최고경영자 제프 그린(Jeff Green·49)은 법정 증언과 인터뷰를 통해 빅테크의 독점적 행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2025년 5월 한 행사에서 "구글과 아마존 같은 폐쇄형 정원(Walled Gardens) 플랫폼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광고주들을 자신들의 매체로만 유도하려는 본질적인 이해 상충을 안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또한 구글의 반독점 재판과 관련하여 "구글은 개방형 인터넷에서 손을 떼고 유튜브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장이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시장은 그의 논리보다 아마존의 가격표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트레이드 데스크의 2025년 매출 성장률은 18.2%로 예상됐는데, 이는 전년의 26%에서 8%포인트나 하락한 수치였다. 성장주의 엔진이 식어가는 와중에 최고재무책임자와 최고운영책임자 등 핵심 경영진이 잇따라 교체되자 투자자들은 패닉에 빠졌다. 2025년 말 트레이드 데스크의 주가수익비율(P/E)은 연초 75배에서 22배 수준으로 폭락했다. 이는 단순한 주가 하락이 아니라, 광고 기술 산업의 중개 모델 자체가 상품화(Commoditization)되고 있다는 시장의 경고였다.
인프라의 시대와 플랫폼의 시련
2025년 웨스턴 디지털과 트레이드 데스크가 보여준 극단적인 격차는 디지털 경제의 가치 배분 공식이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지난 수년간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자본 효율성이 높다는 이유로 하드웨어 기업보다 훨씬 높은 밸류에이션을 누려왔다. 하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실질적인 연산과 저장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자, 시장은 다시 손에 잡히는 자산의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결국 2025년은 인공지능이라는 화려한 불꽃놀이 뒤에서 누가 실제로 석탄을 나르고 공장을 돌리는지를 확인하는 한 해였다. 웨스턴 디지털은 그 공장의 창고지기로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고, 트레이드 데스크는 빅테크라는 포식자가 지배하는 생태계에서 중립적인 중개인으로서 설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몸소 증명했다. 이 드라마틱한 수익률의 반전은 2026년에도 이어질 선별적 장세의 예고편일 가능성이 크다.
시장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혁신이라는 단어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실체가 있는 인프라와 압도적인 비용 우위만이 자본의 선택을 받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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