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몇 점의 그림과 사진 그리고 조각이 있다. 직접 구입한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선물받은 작품들이다. 장욱진의 판화와 김점선의 말 그림은 김수영 시인의 아내 고(故) 김현경의 산문집을 출판한 인연으로 가족이 된 경우다.
김현경의 용인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어지간한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압도적인 수집벽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국립이나 도립미술관 수장고에 있어야 할 수준의 진품들로 가득찬 방과 거실에 입이 딱 벌어졌다. 작품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야기들을 들려주거나 그 예술가와 얽힌 추억담을 펼쳐 보일 때 여느 미술관의 기획전이 따라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비일상의 장소로 연출되고 있는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지인들을 초대해 가끔 집에 전시된 작품들을 함께 나누기도 해요.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기도 하고 주제별 구성을 취해 보기도 하고 더러는 맥락 없이 그냥 느낌대로 뭐랄까 재즈 선율처럼 즉흥적으로 배치해보기도 하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백 세를 눈앞에 두니 부질없다 싶기도 해요.”
그날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의 기초자료를 모으기 위해 동행한 박준 시인과 함께 들은 이야기다. 구슬을 꿰는 합리적인 개념 틀로부터 이제 자신을 놓아 주고 내려놓는 방하착의 자세가 수집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말년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성찰로 다가오기도 했다. 베토벤의 말년 또한 전기의 유기적인 구조와는 전혀 다른 음의 불연속성과 휴지(休止)가 특징이 아니던가.
두 번째 방문했을 때 벽에 걸려 있던 김점선의 그림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베란다 창으로 들어온 자연광의 변화에 따라 갈기의 한 올 한 올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려 유난히 내 눈길을 유심하게 하던 말 그림이었다. 오랫동안 품고 있었는데 이별 준비를 하느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지냈다며 오늘이 그날이라고 했다. 뜻밖의 선물을 염치없이 받아안은 내게 잘 보살펴 달라며 각별한 눈빛을 보내올 때 나는 그것이 사고팔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 그의 혈육과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몇 점의 작품과 더 인연을 맺게 됐다. 그중에도 화가 윤세영의 그림은 수집하다 보니 벌써 다섯 손가락을 넘는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지인들을 부른 뒤 화가를 집으로 초대해 작은 전시 파티를 해보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화가의 반응이 뜨거워 뱉은 말을 어떻게 실천할까를 궁리 중이던 참이었다. 새해 첫날 아침 화가가 ‘카톡’ 사진으로 막 완성한 병오년의 붉은 말 그림을 보내왔다. 행성들 사이로 기립한 말의 도약이 일출의 붉은 햇살처럼 생생했다. 욕심이 났으나 월급쟁이의 경제 규모로는 감히 넘보기 힘든 대작이다.
아쉬움을 달래면서 김점선의 그림을 다시 걸어보기로 한다. 지난해엔 거실 벽에 고정돼 있었는데 새해가 됐으니 정해진 궤도에서 이탈해 식탁 벽 쪽으로 옮겨본다. 김현경이 하던 방식이다. 내친김에 장욱진의 판화를 그 곁에 다시 배치하고 아래에 나태주 선생이 편지에 그림까지 그려 동봉한 ‘풀꽃’ 육필로 마무리를 해본다. 이사를 오면서 도배를 하지 않아 심란하던 벽이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전에 살던 아이들의 낙서와 지워지다 만 음식물 얼룩 같은 것이 마치 부러 꾸민 것처럼 절묘한 무늬가 돼 다가온다.
벽의 성격이 바뀌니 식탁의 어지러운 살림도구들까지 영향을 받아 설치미술의 자세를 취하는가 싶다. 빵도마 하나를 놓더라도 벽에 걸린 그림들의 품위에 손상이 되지 않도록 좌정시킨다. 그렇게 해서 신선해지는 것은 내 마음이다.
같은 세계를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벗어날 수 없는 일상과 함께 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예술의 꿈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세계가 이 세계의 밖이 아니라 예술과 함께 이 세계의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세계의 고착과 반복에 저항하는 전략으로서 나는 낡은 세계를 지불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붉은 말’의 꿈을 꾼다. 곁에 두진 못했으나 붉은 말 그림이 그렇게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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