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대중문화산업에서 연습생은 늘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계약서에 이름은 있지만 권리는 흐릿했고, 보호의 필요성은 말로만 존재했다. 데뷔 이전이라는 이유로, 가능성에 투자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것들이 당연시돼 왔다. 그 관행에 균열을 내는 변화가 시작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일 고시한 '대중문화예술분야 연습생 표준계약서'와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연습생) 표준 부속합의서' 개정안은 그동안 현장에서 ‘암묵적으로’ 처리되던 문제들을 현실적인 계약으로 끌어올렸다.
표준계약서는 강제 규범은 아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사실상 기준선으로 작동해 왔다. 연습생과 기획사 모두가 분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문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개정은 산업의 태도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가장 눈길을 끄는 변화는 정신건강 보호 조항이다. 기존 계약서에서 연습생에 대한 치료 지원은 ‘극도의 우울증세’라는 매우 제한적인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했다. 극단적인 상황이 돼서야 개입할 수 있다는 구조였다. 이번 개정으로 그 문턱이 낮아졌다. ‘우울증세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면서, 기획업자가 연습생의 동의를 전제로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연습생의 정신적 고통을 더 이상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두지 않겠다는 신호다. 동시에 산업 내부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해 온 비극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기도 하다. 정신건강이 계약 조항으로 명문화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전과는 다른 시대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계약 해제·해지 시 손해배상금이나 위약벌 지급 기한을 명확히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상호 협의’나 ‘적정 기간’처럼 분쟁의 여지를 남겼던 표현 대신, 합의된 기한을 명시하도록 한 것이다. 분쟁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을 둘러싼 변화는 더 직접적이다. 학습권 침해를 계약 단계에서부터 명확히 차단했다. 학교 결석이나 자퇴를 강요하는 행위를 금지 사항으로 못 박은 것은, 그동안 현장에서 쉬쉬하며 넘어가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린 조치다.
폭행과 협박만이 아니라 폭언, 강요, 성희롱·성폭력까지 금지 행위로 확대한 점 역시 의미가 크다. ‘지도’와 ‘관리’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언어적·정신적 폭력이 더 이상 회색지대에 머물 수 없게 됐다.
촬영이나 공연 과정에서 보건·안전상 위험이 있음에도 용역 제공을 강요할 수 없도록 한 규정도 현실을 반영했다. 일정과 성과를 이유로 무리한 현장 투입이 반복돼 온 관행에 제동을 거는 장치다.
특히 청소년보호책임자 지정 의무는 구조적 변화다. 보호 책임을 추상적인 조직이 아니라 특정한 직책과 개인에게 귀속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몰랐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구조를 만든 셈이다.
개정안은 연습생과 청소년 예술인의 권리를 강화하는 동시에, 기획업자에게도 기준을 제시한다.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지를 계약 단계에서부터 분명히 함으로써, 예측 가능한 관계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대중문화산업은 이제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경쟁하는 단계에 와 있다. 콘텐츠의 완성도뿐 아니라 제작 환경의 윤리성과 지속 가능성도 평가 대상이 된다. 이번 표준계약서 개정은 산업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시험대에 가깝다.
제도는 만들어졌다. 남은 문제는 현장이다. 계약서가 실제로 지켜질 것인지, 형식적인 문서로 남을 것인지는 업계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연습생과 청소년 예술인이 꿈을 위해 권리를 유예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이번 개정은 그 출발점에 서 있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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