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휴가'에서의 안성기
안성기 배우 장례위원회는 5일 오전 9시쯤 안성기가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이날 밝혔다. 향년 74세. 평생을 스크린에 헌신하며 대중과 호흡했던 거장은 자신의 75번째 생일에 끝내 눈을 감았다. 고인은 지난달 30일 식사 중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며 쓰러져 심정지 상태로 자택 인근 순천향대병원 응급실에 이송돼 치료를 받아왔다.
안성기. 2016년 모습. / 뉴스1
1952년 1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출연하며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당시 6세였다. 8세 때는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에서 소매치기 역으로 출연해 그해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소년연기상과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을 수상했다. 9세 때는 김기영 감독의 명작 '하녀'에 출연하기도 했다. 중학생 때까지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7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독보적인 아역 스타로 군림했다.
안성기(가운데)는 9세 때 김기영 감독의 명작 '하녀'에 출연했다.
동성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연기 활동을 중단했다. 중학교 시절엔 이순재와 같은 무대에 섰고, 경동중학교 재학 시절 '가왕' 조용필을 만나 친구가 됐다. 훗날 한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두 거목이 될 이들의 우정은 학창 시절부터 시작됐다. 조용필은 평소 사석에서 안성기에 대해 중학교 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있었던 친구라고 회상하곤 했다. 촬영장에서 바쁘게 지내느라 공부 기초가 없어 고교 진학 후 수학시험에서 백지를 낼 정도였고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큰형이 참전한 것에 영향을 받아 베트남으로 진출할 생각을 품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에 진학한 그는 학군장교 12기로 지원해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사단장배 암호 조립 해독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열심히 군 복무를 했다. 자서전에는 소위로 근무할 당시 스스로 시나리오도 몇 편 썼다고 기록했는데, 영화화하기보다는 연기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소위로 임관하기 전 베트남 전쟁이 종결됐고, 전역 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전공인 베트남어를 살릴 곳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영화 '병사와 아가씨들'을 통해 성인 배우로 복귀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의 안성기
아역 스타 출신은 성인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부터 군 복무까지 10여 년간 배우 생활을 쉬면서 아역 이미지가 탈색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 아역 때 김정훈 같은 톱스타도 아니었는데, 그것이 성인 배우가 되는 데는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충무로에 복귀한 후 연이은 성공작으로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됐다.
'고래사냥'에서의 안성기
안성기는 이장호, 임권택, 배창호, 정지영 등 1980~1990년대 한국 영화의 혁신을 일군 감독들의 주요 작품에서 거의 모든 주인공을 도맡았다.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안개마을'(1983),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1985),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1990) 등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이 그의 필모그래피를 채웠다. 안성기가 출연하지 않는 한국 영화는 상상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 영화의 간판이었다.
'라디오스타'에서의 안성기
1990년대에는 강우석 감독의 코미디 영화 '투캅스'(1993)로 대중성을 입증했고, 2003년 '실미도'로 첫 천만 흥행 영화의 주인공이 됐다. 이어 '라디오 스타'(2006)에서는 한물간 가수를 끝까지 책임지는 매니저 박민수 역으로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화려한 휴가'(2007)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아역 시절 출연작까지 합치면 그가 출연한 영화는 150편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195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일곱 세대를 관통하며 한국인의 삶과 애환을 스크린에 담았다.
'태백산맥'에서의 안성기.
맡는 배역의 폭이 넓은 것은 안성기의 강점이었다. 웃기고 어리숙한 캐릭터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지적인 캐릭터까지 소화했다. '고래사냥'의 왕초 민우, '투캅스'의 비리 경찰 조 형사, '영원한 제국'(1995)의 고뇌하는 정조,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냉혹한 악역 보스 장성민, '실미도'의 최재현 준위, '라디오 스타'의 매니저 박민수 등 그가 만든 캐릭터 모두가 관객 기억에 남았다.
'실미도'에서의 안성기.
시대가 변해도 특별한 침체기를 겪지 않은 배우였다는 점도 특별했다. 1990년대 흥행 배우 대부분이 2000년대에 넘어오면서 자연스럽지 못한 억양에 침체되는 반면 그는 개성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어울리는 억양을 사용했다.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한국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에서는 역대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을 4년 연속(1982~1985) 수상했고,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1982년, 1983년 2년 연속 수상한 뒤 1985년 한 번 더 받았다.
'투캅스'에서의 안성기.
1994년 백상예술대상에서는 대상과 최우수연기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주연상을 수상한 유일한 배우로, 첫 남우주연상(1982년)과 마지막 남우주연상(2012년)은 무려 30년의 시간 차가 있다. 백상예술대상 8회와 대종상 5회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영화계를 위한 활동에도 앞장섰다. 2000년부터 스크린쿼터 수호천사단 단장을 맡았고, 2006년에는 스크린쿼터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영화불법복제방지 캠페인 '굿다운로더' 홍보대사 등을 역임했다. 한국 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시절, TV 드라마 출연을 자제하며 영화계를 지킨 것도 그였다. 자신만은 한국 영화를 위해 TV 드라마 출연을 자제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천했다. 함량 미달의 작품도 한국 영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이라도 하겠다는 철학을 지켰다.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오던 중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2020년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6개월 만에 재발했고, 2022년 개봉한 '한산: 용의 출현'과 '탄생'에 출연하며 연기 투혼을 보였다. 2023년 특별출연한 '노량: 죽음의 바다'가 사실상 유작이 됐다. 그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식, 4·19 민주평화상 시상식 등에 모습을 드러내며 복귀 의지를 보였다. 심정지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단 회의를 매주 주재하는 등 사업 활동도 열심이었다.
안성기는 여러 배우에게 영향을 미친 선배이기도 했다. 신현준은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을 보고 배우가 됐다고 밝혔다. '태백산맥' 촬영 당시 같은 숙소를 쓰며 이 사실을 털어놨을 때 안성기는 "응, 그런 애들 많아"라고 담담히 답했다고 한다. 실제로 1980년대와 1990년대 젊은 남자 배우들 대부분은 안성기를 보고 배우가 됐다. 차승원도 같은 영화를 보며 딸을 잃은 슬픔을 숨기려는 아버지 연기에서 진짜 연기를 느꼈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함량 미달의 작품도 거절하지 못해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잃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런 작품에서조차 기억에 남는 건 안성기뿐이었다. 평생 단 한 번의 스캔들 없이 최고의 자리를 지킨 '국민 배우'라는 칭호의 시초격 인물이었다. 지난해는 대한민국예술원 영화분과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화가인 아내 오소영씨와 아들 다빈·필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 장례는 5일간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후배 배우 이정재·정우성이 운구한다. 발인은 9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양평이다.
한국 영화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에는 늘 안성기가 있었다. 안성기는 이제 고단했던 투병의 짐을 내려놓고 별이 돼 한국 영화를 지켜보는 영원한 수호자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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