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김기주 기자] 영영 사라질지도 모를 풍경의 마지막 장면 같은 이야기가 찾아온다. 골짜기의 봄은 호리 소와 아흔아홉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3일 방송되는 KBS1 ‘다큐온’은 외딴 산골에서 99년의 세월을 살아낸 엄옥화 할머니의 삶을 담은 <호리 소와 아흔아홉 어머니> 편을 통해 시간이 남긴 흔적과 가족의 의미를 조용히 비춘다. 호리>
엄옥화 할머니(99)는 자신의 삶을 숫자로 기억한다. “콩은 60가마니, 옥수수는 30가마니, 팥은 다섯 가마니.” 열여섯 나이에 강원도 평창 용소골로 시집와 아흔아홉 노파가 되기까지, 그의 기억은 얼마나 많은 밭을 부쳤는지, 얼마나 많은 가마니를 거뒀는지로 이어진다. 어여쁜 것은 가만두지 못하는 성미 탓에 마을 곳곳에 야생화를 심어 결국 동네를 꽃대궐로 만들었다. 백수를 바라보는 지금도 얼굴에는 고운 미소가 남아 있다.
하지만 긴 세월에는 상처도 켜켜이 쌓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겪으며 전쟁 통에 자식 둘을 기아로 잃었고, 이후에도 다섯을 먼저 떠나보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주저앉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다시 땅을 일구고 또 일궜다. 그는 “매화도 한 철이듯 사람도 한 철이니, 때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흔아홉 번의 봄이 결코 거저 오지 않았음을 그의 삶이 증명한다.
엄옥화 할머니는 지금도 아들 이병우 씨(75), 며느리 이은화 씨(75)와 함께 옛집에서 산다. 용소골은 비탈지고 척박해 기계 대신 호리 소와 쟁기로 농사를 짓는다. 형과 누이를 잃은 뒤 큰아들이 된 이 씨는 가난에 발목 잡혀 골짜기를 떠나지 못했지만, 그 덕에 어머니 곁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는 보기 힘든 호리 소와 함께 비탈밭을 일구는 풍경이 이곳에 남아 있다.
봄이면 산밭을 갈고, 여름이면 고추를 거두며, 가을에는 콩과 깨를 털고, 겨울이면 소 멍에를 만들고 메주를 띄운다. 자연의 순리에 기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골짜기의 시간을 채운다. 청정한 자연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들의 마지막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병우 씨네에는 일소 두 마리가 있다. 산골에서 소만 한 자산은 없다. 두 소는 밭을 가는 것은 물론 송아지를 낳아 살림을 보탰다. 올해도 두 마리의 송아지가 태어났지만, 곧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는 이는 자식을 여럿 잃어본 옥화 할머니다. 그는 “자식은 뭘 해도 어여쁘다”며 아흔아홉의 나이에도 자식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림자 노릇을 한다.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돈도, 집도 아닌 매일 왔다가 매일 사라지는 시간과, 그 시간만큼 더 애틋해지는 자식이라고 답한다. 지나고 나서야 불쑥 깨닫게 되는 ‘소중한 것들’을 전하는 이번 이야기는 3일 밤 10시 20분, KBS1 ‘다큐온’ '호리 소와 아흔아홉 어머니'를 통해 방송된다.
뉴스컬처 김기주 kimkj@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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