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국민연금 해외투자 축소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1400원 후반대의 환율은 우리 경제 펀더멘털과 괴리가 크다고 진단하며, 새해에도 환율에 대한 경계를 유지하며 외환시장 개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특히 고환율 원인으로 "내국인의 기대가 환율 상승에 크게 드라이브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외환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른 국민연금의 역할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20여년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시절에도 이 총재는 국민연금 역할론을 강조하긴 했다. 다만 해외투자에 대한 시각은 지금과 반대였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천문학적 규모로 불어날 기금의 향방이 국내 금융시장에 메가톤급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예고하면서, 해외투자를 포함한 공격적인 기금 운용 필요성을 앞장서 강조했다.
2001년 '국민연금기금의 운용방향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이 총재는 국내 채권에 편중된 기금의 포트폴리오를 우려하며 "국민연금은 주식, 회사채, 해외투자 등으로 투자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2004년 보건복지부가 꾸린 '국민연금 중장기 기금운용 마스터 플랜 기획단'에서 중장기 투자정책팀장을 도맡아 2009년까지 위험자산 투자를 18%까지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이날 이 총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새 판을 짜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당시 예상대로 국민연금 영향력은 메가톤급으로 커졌지만, 덩달아 해외투자 규모 역시 우리 외환시장을 뒤흔드는 수준까지 확대됐기 때문이다. 10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해외투자액은 전체 자산의 57.96%에 해당하는 827조4620억원이 이른다.
이젠 국민연금 기금 규모가 너무 커져 외환시장의 큰 손이 됐기 때문에 프레임워크 자체가 바뀌어야 된다. 거시적인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옵티멀 포트폴리오(최적 자산배분)'를 짜는 건 맞지 않다.
특히 이 총재는 해외투자 규모와 타이밍, 환헤지 전략이 과도하게 시장에 노출되며 환율 절하 기대가 한 방향으로 쏠린 점을 우려했다. 그는 새해를 맞아 시무식 신년사는 물론 시무식 이후 기자들과 만나서도 외환시장에서의 국민연금 역할론을 피력했다.
이 총재는 "해외 투자은행(IB)들은 현재 환율 1480원이 과도하게 높다고 보고, 올해 환율을 1400원 초반대로 전망한다"며 "반면 국내 투자자와 기관들만 유독 '1500원 간다'는 전망을 내놓고 일부 유튜버들은 '원화가 휴지조각이 된다'고 한다"고 꼬집었다.
적정 환율 수준에 대해선 "얼마라고 얘기하긴 어렵지만 상당 부분이 달러인덱스(DXY) 흐름과 괴리를 보이며 우리만 과도하게 오른 것은 기대 심리가 작동한 결과"라며 "대미 투자로 연간 200억 달러가 빠져나가고, 국민연금도 기계적으로 투자한다는 식으로 기대가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국민연금이 거시적 영향을 고려한다면 지금보다 환헤지 비중을 확대하고, 해외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환율이 1480원일 때와 1400원일 때 같은 속도로 해외투자를 지속할 이유는 없으며, 고환율 구간에서는 필요한 투자만 집행하고 나머지는 환율이 안정된 이후로 미루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국민연금의 대규모 해외투자로 국내시장이 커지기 어려운 구조가 된 것도 문제"라며 "내국인의 취업 부진, 고환율로 인한 수입업체 비용 부담 등 국가 경제 전체 차원을 국민연금이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이 총재는 "2000년대 초반 적극적으로 해외투자를 하자는 입장이었지만 환헤지를 '제로'로 놓는 것은 이론적으로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해외자산을 처분하는 시기에는 수익률이 크면 클수록 고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국민연금을 동원해 노후 수익률을 훼손한다'는 비판에도 반박했다. 그는 "해외 투자를 할 때 외환시장에 영향을 줘 환율이 높아지면 미국 투자의 수익률이 굉장히 높아지지만 회수할 때는 반대 효과가 나타난다"며 "이 점을 고려해 환헤지를 지금보다는 더 많이 하고 해외로 나가는 비중을 줄여야 하는데 이게 과연 수익률을 훼손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캐나다 연기금 환헤지 비율 0% 사례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캐나다 연기금은 달러표시 채권을 발행하고 있는데 이게 달러 채무로 잡혀 실질적으로는 자연적으로 20% 정도 환헤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며 "우리 국민연금도 최근 해외채권 발행을 검토 중이라 하는데 이것도 외환시장 영향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만 이 총재는 "고환율의 원인을 특정 경제주체의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외환시장에 어떤 요인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과학적·객관적으로 분석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이어 "외환당국과 거시경제를 운용하는 주체들이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채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앞서 시무식에서도 "진지한 성찰 없이 거시적 영향을 부처 간 조율할 수 있는 범정부적 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현 상태가 지속한다면 외환시장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조차 국민연금은 달러를 정해진 계획에 따라 기계적으로 매입하고 외환당국은 환율을 관리하기 위해 달러를 매도해야 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이런 관점에서 국민연금 해외투자의 '뉴프레임워크' 구축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 것은 큰 진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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