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금융 시장의 역사에서 제레미 그랜섬(88)만큼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그리고 그토록 오랫동안 받아온 인물은 드물다. 자산운용사 GMO의 공동 창립자이자 수석 투자 전략가인 그는 '영구 약세론자'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가 추구하는 바는 비관론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적 데이터와 평균 회귀라는 냉혹한 물리 법칙(통계학의 기본법칙으로 극단적인 값이 평균으로 근접하는 현상)에 기반한 가치 투자다. 곧 출간을 앞둔 그의 회고록이자 투자 지침서인 ‘영구 약세장의 탄생: 단기적인 세상에서 장기 투자의 위험’은 그가 60여 년간 시장의 파고를 겪으며 정립한 지혜를 집대성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제레미 그랜섬은 60년 투자 경력 동안 '평균 회귀'라는 물리 법칙을 신봉하며 시장의 거품을 예견해 온 전설적인 투자가다. 초기 투기적 실패를 통해 가치 투자의 본질을 깨달은 그는 신간 ‘영구 약세장의 탄생’을 통해 단기주의의 위험성을 고발한다. 그는 현재의 인공지능 광풍을 경계하는 동시에 독성과 인구 붕괴라는 구조적 위기가 자본주의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는 파격적인 통찰을 제시한다.
특히 그가 경력 초기에 겪었던 뼈아픈 실패와 그로부터 비롯된 사상적 전환은 그가 왜 단순한 투자가를 넘어 인류의 생존과 환경 보호를 걱정하는 활동가로 변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레미 그랜섬의 투자 철학은 그의 출생 배경과 초기 경력의 극적인 대조에서 시작된다. 1938년 대공황의 끝자락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 요크셔의 탄광 마을에서 자라며 절약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퀘이커교적 가치를 체득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에게 내재적인 검소함을 심어주었으나, 1960년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시장에 뛰어든 젊은 그랜섬은 시대의 광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자신이 어린이용 보드게임인 모노폴리에서 가장 효율적인 부동산을 찾아내 올인하던 승부사적 기질을 시장에서도 발휘하려 했다고 고백했다.
1960년대 후반 제레미 그랜섬은 당시 유행하던 우량주 대신 소형주와 투기적인 자산에 집중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스스로를 영리한 분석가라고 믿었으나, 실제로는 시장의 거품에 올라탄 것에 불과했다. 이 시기 그가 겪은 가장 결정적인 위기는 아메리칸 에어 필터와 같은 변동성 큰 종목들에 대한 과도한 베팅에서 비롯됐다. 시장이 냉각되자 그의 포트폴리오는 처참하게 무너졌고, 그는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 씁쓸한 경험은 그에게 투기의 위험성을 각인시켰으며, 화려한 성장주가 아닌 '가격과 가치 사이의 괴리'에 집중하는 가치 투자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그랜섬은 좋은 시절은 언제나 더 지루하고 평범한 시절로 회귀한다는 평균 회귀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는 이 원칙을 가슴 아픈 원리라고 부르는데, 이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환상이 결국 현실의 중력에 의해 추락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력의 법칙과 데이터가 말하는 진실
주식 투자 실패 이후 그랜섬은 시장을 정복하는 대신 시장의 역사를 이해하기로 결심했다.
1970년대 초 그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던 소형주 및 가치주 지수를 직접 손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데이터가 부족했던 시절, 과거의 흐름을 수치화하여 분석하려는 그의 시도는 그를 '데이터 기반 투자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그는 1971년 배터리마치 파이낸셜 매니지먼트를 공동 창립하며 상업용 인덱스 펀드를 제안했는데, 이는 당시 업계에서 아무런 비즈니스도 없는 가장 많이 회자되는 제품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급진적이었다. 1977년 GMO를 설립한 후, 그랜섬은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GMO는 산업용 세탁기 크기의 하드드라이브를 구매해 컴퓨터 기반 투자 분석을 도입한 최초의 자산운용사 중 하나였다.
평균 회귀를 수학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그랜섬은 종종 시그마( σ )이벤트를 활용한다. 그는 자산 가격이 역사적 추세에서 표준편차의 2배(2 σ) 이상 벗어날 때 거품이 시작된 것으로 보며, 3배(3σ)에 도달할 경우 이를 슈퍼 버블로 규정한다. 제레미 그랜섬의 명성은 역설적으로 그가 시장에서 소외됐던 시기에 쌓였다. 그는 30개가 넘는 역사적 거품을 분석하며, 광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 이를 경고하고 포지션을 정리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반복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90년대 후반의 닷컴 버블이었다. 제레미 그랜섬은 주가수익비율이 역사적 고점을 훨씬 상회하는 상황에서 고객들에게 경고를 보냈고, 이는 수조 원에 달하는 자금 이탈로 이어졌다.
당시 한 고객은 그를 두고 위험할 정도로 설득력 있지만 완전히 틀렸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2000년 거품이 붕괴하면서 그의 자산 운용 규모는 2.5억 달러(약 3,337억 원)에서 정점인 1,550억 달러(약 206조 9,250억 원)까지 급성장했다. 제레미 그랜섬은 이에 대해 주요 강세장에서 경고를 울리는 것은 끔찍한 비즈니스라고 회고하면서도, 최고의 아이디어는 결국 정상에 오르지만 기다리는 동안 파산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과정은 옳은 말을 함으로써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경력 위험의 전형을 보여주며, 제레미 그랜섬이 왜 단기 수익보다 장기적인 생존에 집착하게 됐는지를 설명한다.
신간 '영구 약세장의 탄생'에서 제레미 그랜섬은 단순히 과거를 복기하지 않는다. 그는 에드워드 챈슬러와 함께 집필한 이 책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가 직면한 구조적 결함을 분석한다. 그는 특히 2025년 현재의 시장 상황을 1929년과 2000년의 슈퍼 버블과 비교하며 인공지능이라는 서사가 만들어낸 새로운 광기를 경계한다. 그는 인공지능이 실질적인 혁신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수익성이 주가에 반영되는 방식은 전형적인 후기 단계 거품의 수직적 상승 곡선을 따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미국 시장 시가총액의 30% 이상이 매출의 10배가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는 점은 그에게 강력한 경고 신호다.
금융을 넘어 인류의 생존을 묻다
제레미 그랜섬의 철학적 확장은 금융 시장을 넘어 생태계와 인류의 생존 문제로 이어진다. 그는 자신의 부가 증가할수록 인류가 직면한 환경적 위기에 대한 경각심도 커졌다고 밝혔다. 그는 현재 자신의 전 재산의 98%를 환경 보호를 위한 '제메리 그랜섬 재단'에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그의 신간과 2025년 백서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독성과 인구 붕괴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발명된 수십만 개의 화학 물질, 특히 과불화화합물(PFAS)과 같은 영원한 화학 물질이 인간의 내분비계를 교란하고 생식 능력을 저하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보건 문제가 아니라 노동 인구의 감소와 경제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지는 치명적인 자본주의의 위협 요소라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그랜섬은 독성 물질로 인해 지난 50년간 평균 정자 수가 3분의 2 이상 감소했으며, 테스토스테론 수치도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경고했다. 그는 현재 추세가 계속된다면 20~30년 안에 대부분의 부부가 임신을 위해 의학적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러한reproductive impairment(생식 능력 손상)는 인구 감소의 숨겨진 동력이 되고 있다.
실제로 일본의 출생아 수는 1948년 250만 명에서 현재 70만 명 미만으로 급감했다. 제레미 그랜섬은 인구 감소는 이론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현실이라며, 20세 인구가 1948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일본의 사례를 인용했다. 그는 이러한 구조적 변화가 기존의 경제 모델을 무너뜨릴 것이며, 투자자들은 장기적인 '탄소 버블'과 '인구 버블'의 붕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바이엘(Bayer)이 몬산토를 인수한 후 암 유발 논란이 있는 제초제 관련 소송으로 주가가 75% 하락한 사례는 기업이 독성 문제에 직면했을 때 주주 가치가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법정의 냉혹한 증거가 됐다.
제레미 그랜섬은 인류가 좋은 뉴스만을 보고 싶어 하는 절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핵 위협, 기후 위기, 인구 붕괴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도 시장이 사상 최고의 낙관론을 보이는 것에 대해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증언이라고 냉소했다. 그의 자산 배분 전략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자산에 집중한다. 그는 미국 대형주에 대해 비중 축소를 권고하는 반면, 일본 및 해외 가치주, 그리고 강력한 현금 흐름과 낮은 부채를 가진 퀄리티 주식으로의 도피를 제안한다.
제레미 그랜섬이 60년 전 초기 투자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은 명확하다.
시장은 인간의 탐욕을 동력으로 삼아 이성적인 범위를 벗어날 수 있지만, 결국에는 펀더멘털이라는 본질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 '영구 약세장의 탄생'은 단순한 약세론자의 항변이 아니다. 그것은 데이터에 대한 집요한 탐구, 커리어 리스크를 무릅쓰는 용기, 그리고 나 개인의 부보다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우선시하는 철학적 성찰의 기록이다. 곧 공개될 그의 회고록은 시장의 소음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 투자자들에게 지루하고 평범하지만 안전한 시절로 돌아가는 길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현재 제레미 그랜섬이 이끄는 GMO의 벤치마크 프리 포트폴리오는 2025년 인공지능 테마를 피하면서도 17.9%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시장 대비 4.1%포인트 초과 성과를 냈다. 이는 그가 단순히 시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합리적인 가격에서 혁신을 소유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중력은 결국 작용할 것이고, 그때가 오면 데이터에 근거해 기다려온 이들이 다시 한번 승리할 것이라는 게 그의 변함없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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