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한여진이 보내 온 '서른 시'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시인 한여진이 보내 온 '서른 시'

바자 2026-01-01 08:00:00 신고

3줄요약

서른 살


침잠하고 흔들리고 나아가며. 누구나 기억하는 서른이 있지만 그 형상은 유독 다른 모양이다. 지금 서른을 통과하는 〈바자〉에게, 두 젊은 시인이 건넨 시.


한여진

“30대. 어린 나를 누구보다 많이 떠올리는 시기입니다. 앞으로 계속 달려야 한다는데 뭔가 두고 온 것이 있어 머뭇거리게 됩니다. 꿈속에서 만난 나를 닮은 어린아이에게 자꾸만 말을 걸고 그 아이의 안녕을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잘 자라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러니 그때 돌보지 못한 아이의 손을 잡고 지금의 나를 돌봐주세요. 이제 우리는 그만큼 강하잖아요.”


희, 에게


너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너는 꿈속에 있어

너는 1996년 봄에 있어

너는 홍콩의 비 내리는 오후 세시에 있어

너는 다락방의 보름달 훤한 밤에 있어


신호는 울리는데 아무도 받질 않아


나의 전파는 그저 밤하늘을 돌 뿐이고

밤하늘이란 꿈을 뒤집어 빨랫줄에 널어놓은 것

어서 마르기를 바라지만 아직 축축한

겨우 그만큼의 세계 안에서


희야,

이 고구마 좀 받아라


큰엄마가 문을 열고 쟁반을 들이민다

그러고 보니 이 쟁반은 희가 야생동물보호협회에서 훔쳐온 것

이게 그때의 쟁반인가 싶지만 아무렴


희의 삼십년을 미리 살아본 내가

밤하늘에 쟁반을 던지며 빙글빙글 돌리는 세계


이거 먹을까? 묻을까?

밭에서 직접 키웠다는 고구마를 보며 어린 희는 물었지


이쪽 세계의 희가 뜨거운 고구마 호호 불어 먹으면

저쪽 세계의 희는 고랑 파고 땅속 깊이 고구마를 묻는다


그러니 우리의 시차는 땅속 고구마 뿌리로 연결되어 있어


마음이 헛헛할 때는 군고구마 두 봉지

우는 법이 기억나지 않을 땐 고구마맛탕 300그램

어젯밤 꿈이 기억나지 않을 땐 고구마스프 한 그릇


이건 어린 나에게 보내는 나만의 레시피

그러니 거기서도 밥 잘 먹고 어디서든 기죽지 말고 험한 것들 때문에 사랑을 잊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내 말 잘 들었지?


공중전화 부스를 나오는데

누군가 잊고 버려둔 쟁반이 있었다

크고 눈부셨다


언젠가 희에게 줘야겠다 생각하며

얼른 주워 품속에 넣었다

Copyright ⓒ 바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