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해가 왔습니다. 먼저 인도 속담이 떠오릅니다.
'그 날 밤의 꿈이 평화롭도록 하루를 살고
노년의 삶이 평화롭도록 젊은 시절을 살고
내세의 삶이 평화롭도록 노년의 삶을 살라.'
하나만 더 보태면 완벽할 듯 합니다.
'일 년의 삶이 풍요롭도록 1월을 잘 보내라.'
해마다 새해가 되면 '올 한 해는 잘해 보리라'는 뜨거운 마음을 먹습니다. 젊은 시절엔 가족과 함께 남한산성, 마니산, 동해를 찾아 일출을 맞이했고, 때로는 촛불을 켜놓고 새해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첫 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로운 기운을 얻고 싶어서였지요. 내게 새로운 365일이 생겼습니다. 이 날들을 알차게 보내면 계획한 것들이 잘 이루어지오리다. 이런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며 각오와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연말이 되면 퇴색되어 포도 위를 뒹구는 초라한 낙엽처럼 씁쓸함이 남곤 합니다. 시작은 조촐하지만 연말은 더 풍성하게 마무리 하고 싶은 간절한 바램을 가져 보지만. 매번 '시간을 잘 활용해야지,'가까운 사람을 더 배려해야지' 등 '해야지' 라는 결의로 끝났음을 매번 깨닫게 됩니다. 결의와 실행은 별개라는 것을 지난 1년 동안 아니 60년이 넘도록 몰랐을 리도 만무한데도 말입니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심리학에 '귀인(歸因)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사람은 지각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 원인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개인은 성공적인 결과는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좋지 않은 성과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옛부터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말입니다.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을 누구에게 돌리느냐에 따라 다음 행동과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결과가 나빴던 이유가 자기 자신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외부 환경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세월은 '환경 탓, 남의 탓'을 할 수가 없더군요. 나 역시 환경 탓이나 남의 탓을 하려고 제 마음 깊숙한 구석구석까지 뒤적였지만 결론은'내 탓'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뇌'에 속았습니다. 내 유전자와 뇌는 ‘현재의 나’를 최대한 보호하고자 무조건 괜찮다고 하더군요. 공부나 운동을 하려할 때 귀찮기도 해서 주저주저 하면, 어김없이 나의 뇌는 '괜찮아. 피곤하잖아. 내일하면 돼.'하면서 계속 '미래의 나'에게 떠넘겼습니다. 다음 달이면 해결되는 줄 알았죠. 그 다음 달이면... 그렇게 12월에 도달하다보면 까다로운 숙제들만 쌓여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들더군요. 지난 1년을 돌아보아도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먼저 듭니다. 올해 하기로 한 것들을 돌이켜 보다 이제 나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합니다. 하루 이천보 걷는 게 허다한데 만 보의 목표는 왜 세운 것이냐.
주인인 '내'가 괴로워하니 다시 '나의 뇌'는 특유의 논리로 나를 합리화합니다.
"그럴 수도 있어. 새해가 밝으면‘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 다시 시작하면 돼."
달콤한데다 그럴 듯 합니다. 그런데 '새해엔 좋아질 것이다. 이번만은 다를 것이다.' 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같은 패턴을 반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지인이 '<새로운 나>는 내 뇌의 상상 네트워크가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라는 장동선 한양대 교수의 말을 소개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능력치가 1월1일이 된다고, 다시 말해 어떤 시간의 경계를 지난다고 갑자기 좋아질 리야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시간을 소홀히 사용했습니다. 꼭 하고 싶고, 보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매진했더라면 삶의 궤도가 달라졌을 텐데... 그만 목표를 잃고 허겁지겁 살다보니 시간이 모래알처럼 내 손아귀를 빠져 나갔더군요.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시간과 정성을 쏟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늘 코 앞의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해 눈에 자주 띄지 않은 가족과 지인은 완전히 뒷전이었습니다. 내 형편에 따라 편리한 대로 살다가 아쉬우면 그들을 찾는,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딱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얼마나 괘씸했을까요?
그들이 너그러운 사람들이라 나를 이해해 주었기에 그럭저럭 살아왔음을 깨닫습니다.
너무 내 탓만 하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해 이렇게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신년계획은 의미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나같은 사람에게 나태주 시인의 소박하고 순수한 <새해인사>는 큰 위로가 됩니다.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덤으로 /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또 한번 '덤’으로 은혜로운‘선물’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여전히 새로움과 기대감을 줍니다. 안타까운 건 이 덤조차 사치인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극심한 양극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도 함께 헤아려 볼 때입니다. 또한 나의 눈에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면, 내 심장이 아직도 힘차게 뛴다면, 지금 어렵더라도 내일은 밝아질 것이라 기대합니다. 다가오는 2026년은 불꽃처럼 뜨겁게 달리는 붉은 말띠의 해, 병오년입니다. 내가 반복하는 것만이 내 자신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일상 속에서 작은 것들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서슬 퍼런 세상 속에서 나의 삶의 늠름함과 고결함이 희석되거나 손상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추스르며 쉼없이 나아가렵니다.
여러분들도 시 제목처럼 ‘새해 인사’를 드리며 축복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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