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억 원의 무게와 무너진 유리성
다니엘 생애와 K-팝의 구조적 불신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1부(남인수 부장판사)에 배당된 한 장의 소장은 그간 K-팝이 쌓아올린 화려한 성벽 뒤의 균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어도어가 2022년 7월에 데뷔한 5명의 뉴진스 멤버중 유일하게 다니엘(20)과 그의 가족(다니엘의 엄마로 추정), 그리고 민희진(46) 전 대표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액은 약 430억 9000여 만 원이다 .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한 아티스트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산업의 신뢰 자본에 매겨진 잔인한 가격표다.
재판을 맡은 남인수 부장판사는 과거 남양유업 매각 소송 등에서 계약서 문구 하나하나를 엄격하게 해석해 온 원칙론자로 알려져 있다. 하이브와 민희진 전 대표 사이의 주주간 계약 해지 소송을 이미 심리 중인 그가 이번 사건까지 맡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법원은 이 거대한 분쟁의 뿌리가 하나임을 직시하고 있다.
다니엘 마쉬, 혹은 모지혜라는 이름의 소녀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완벽한 K-팝의 서사였다. 2005년 호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북수국적자로 태어난 그는 4살부터 7살까지 경기도 파주에서 자라며 한국 문화를 흡수했다 . tvN 레인보우 유치원을 통해 보여준 천진난만한 모습은 대중에게 각인된 그의 첫 번째 브랜드였다 . 이후 호주로 돌아가 뮤지컬 마틸다의 무대에 서며 예술적 깊이를 더했던 그는 2020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쏘스뮤직과 어도어의 연습생이 됐다 .
민희진 전 대표는 그런 다니엘을 뉴진스의 글로벌 브릿지로 낙점했다. 민희진 전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뉴진스 애들이랑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관계 그 이상"이라며 정서적 유대를 강조했다. 다니엘 역시 이에 화답했다. 그는 포닝 메시지를 통해 "저희는 언제나 대표님의 편이다. 어떤 길을 선택하더라도 대표님과 함께 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과 분쟁 초기 다니엘은 민희진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님. 제가 엄마(민희진 대표를 의미)한테 그냥 갈게요"라고 울먹였다는 일화는 이들의 관계가 단순한 계약을 넘어선 유사 가족적 형태였음을 시사한다. 다니엘은 평소에도 민희진 전 대표에게 보낸 편지나 메시지에서 "저희를 온 힘으로 지켜주며 보살펴준 우리 대표님, 저희의 엄마이자 정말 멋진 워리어(Warrior) 같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각별한 유대감을 드러내 왔었다.
보이지 않는 손과 천문학적 위약벌의 산식
하지만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감정은 법리의 칼날을 이기지 못한다. 어도어가 청구한 431억 원의 산출 근거는 표준전속계약서상의 냉혹한 산식을 따른다 . 법조 전문가들은 인당 위약벌이 최대 1000억 원을 상회할 수도 있다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위약벌은 통상 계약 해지 시점 직전 2년간의 월평균 매출액에 잔여 계약 기간인 54개월을 곱해 산정된다. 2024년 어도어의 매출액이 약 1111억 8000만 원임을 감안하면, 다니엘 한 명의 이탈로 인해 증발한 경제적 가치는 천문학적이다.
어도어 관계자는 다니엘과의 결별 이유에 대해 "전속계약과 저촉되는 계약을 체결하거나 독자 연예 활동을 하는 등 위반 행위가 발생했고, 시정을 요구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특히 어도어는 이번 분쟁의 책임을 다니엘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 1인(다니엘 엄마로 추정)에게도 묻고 있다. 가족이 제3자로서 전속계약의 이행을 방해하고 멤버의 이탈을 주도했다는 '제3자 채권침해'의 논리다.
이 지점에서 K-팝 특유의 리스크가 부각된다. 아티스트의 부모는 종종 매니지먼트의 파트너가 아닌 분쟁의 주체가 된다. 다니엘의 부모를 포함한 뉴진스 멤버들의 부모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하이브가 사실확인 없이 허위사실을 대변하는 기사를 배포하고 있다"며 입장의 왜곡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서적 억울함이 아닌, 실제 계약 해지를 유도하기 위해 외부 세력과 접촉했는지 여부를 뜻하는 탬퍼링의 증거다. 탬퍼링이란 연예계에서 계약 기간 중인 연예인을 몰래 접촉해 빼가려는 불법적 간섭 행위를 뜻한다.
감정적 유대와 법적 책임의 잔인한 괴리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소송 결과가 가져올 파괴적 효과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손해배상 채무가 개인회생이나 파산으로도 탕감받지 못하는 비면책 채무가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낸다. 한 전문 변호사는 "다니엘의 행위가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로 인정될 경우, 손해배상 책임은 평생을 따라다닐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예인은 사업소득자로 분류되어 월급 압류 제한 규정의 보호도 받기 어렵기 때문에 정산 수익 전액이 압류될 위험도 존재한다.
재판의 핵심은 민희진 전 대표와 다니엘 측이 뉴진스의 이탈과 복귀 지연을 주도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어도어는 하니의 복귀를 확정하며 "멤버들이 오랜 기간 왜곡되고 편향된 정보를 접하며 회사에 오해를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다니엘은 어도어의 계약 위반이 먼저 있었다는 취지로 맞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법원이 전속계약 유효 확인 소송에서 어도어의 손을 들어준 바 있어, 다니엘 측의 방어 논리는 좁아진 상태다.
뉴진스는 결국 5인 완전체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하니, 해린, 혜인의 복귀와 민지의 논의 지속이라는 흐름 속에서 다니엘만은 독자 노선을 택했다. 다니엘은 과거 "전속계약이 해지되면 자유롭게 저희가 진정으로 원하는 활동을 해나가려 한다"고 말했지만, 그 자유의 대가는 431억 원이라는 현실적인 압박으로 돌아왔다.
이번 사건은 K-팝 산업이 아티스트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방식에 있어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아티스트의 자율성과 기획사의 투자 보호라는 두 가치가 충돌할 때, 법은 결국 계약서라는 활자화된 약속에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 다니엘이 호주 시드니의 영 아티스트 페스티벌에서 무대를 즐기며 압력밥솥을 부상으로 받고 환하게 웃던 소녀에서, 431억 원의 소송 대상자로 변모한 과정은 K-팝이 지불해야 할 성장통의 크기를 상징한다 .
어도어가 제출한 소장에는 다니엘의 행위를 고의적 계약 위반으로 규정하는 공격적 논리가 가득하다. 만약 재판부가 이를 수용한다면, 다니엘은 향후 수십 년간 자신의 창작 활동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소송 비용과 배상금을 갚는 데 써야 할지도 모른다. K-팝 역사상 가장 화려하게 데뷔했던 소녀 중 한 명인 그가 가장 긴 법적 터널을 지나게 된 현실은 산업 전반에 무거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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