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스경제=임준혁 기자 | 올해 국내 다수의 주력 산업들은 내부 공급 과잉·수요 부진과 미국발 관세 등의 여파로 힘든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방위산업은 이러한 불황을 모르고 전 세계를 무대로 수주를 따내고 수출을 이어가는 등 전략산업으로서의 지위를 한층 다져 나갔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한화에어로스페이스·현대로템·LIG넥스원·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방산 4사의 합산 수주잔고는 100조원 안팎으로 집계됐다. 이들 4사의 연간 합산 영업이익은 5조원 돌파가 유력하다.
K-방산은 올해 단순히 무기를 파는 것에서 진일보해 공동 개발, 기술 이전, 현지 생산, 방산 인력 양성 등 ‘현지화’ 전략에 기반한 장기 파트너십 사업 모델 구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유럽과 중동을 중심으로 국내 방산기업들은 단발성 무기 공급자가 아닌 장기 안보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방산기업과 폴란드와의 협력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K2 전차와 K9 자주포, 항공기 도입을 넘어 현지 생산과 유지·보수, 군수 체계 구축까지 협력이 확대됐다. 단기간에 물량을 공급하는 능력뿐 아니라 납품 후 운용 전반을 함께 책임지는 구조가 신뢰를 쌓는 기반이 됐다. 이는 신속한 납기 준수와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진입하기 어려웠던 유럽 시장에서 K-방산의 위상을 끌어올린 요인으로 꼽힌다.
방산업계의 맏형 격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K9 자주포(탄약·엔진)와 다연장 유도무기 천무(발사대·유도미사일) 등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앞세워 유럽과 중동 시장에서 후속 군수 지원과 현지 생산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29일 폴란드 군비청과 사거리 80km급 천무 유도미사일(CGR-080)을 공급하는 5조6000억원 규모의 3차 실행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지난 10월 폴란드 방산기업 WB 일렉트로닉스와 공동 출자해 설립한 합작법인(JV) ‘한화-WB 어드밴스드 시스템(HWB)’과의 컨소시엄을 통해 체결됐다. 향후 폴란드 현지에 구축될 HWB의 전용 생산공장에서 만들어질 천무의 유도미사일이 폴란드군에 인도될 예정이다.
현대로템은 K2 전차를 중심으로 폴란드 현지 생산과 기술 이전을 병행하는 모델을 정착시키며 전력화 이후까지 이어지는 협력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KAI는 FA-50 경공격기를 중심으로 훈련과 정비, 운용을 포괄하는 통합 패키지를 제시하며 공군 전력 전반의 신뢰도를 쌓아가고 있다.
LIG넥스원은 유도무기와 레이더 등 핵심 전자·미사일 기술을 앞세워 기존 수출국과의 추가 계약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이들 방산 4사의 공통점은 '얼마나 팔았는가'보다 '얼마나 오래 함께 가는가'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이 같은 신뢰 기반 확장은 글로벌 방산시장 환경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시화되면서 단기 구매보다 안정적인 공급망과 신속한 대응 능력이 중요해졌고 이는 한국 방산기업의 강점과 맞아떨어졌다. 납기 준수와 운용 안정성에서 쌓은 긍정적인 평판은 후속 계약과 추가 사업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출 시장 다변화도 괄목할 만한 성과란 평가다. 올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K9 자주포를 유럽과 중동 등 기존 시장뿐 아니라 인도, 베트남 등으로 확대함으로써 수출의 지평을 넓혔다.
지난 7월 정부 간(G2G) 거래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를 통해 베트남에 납품된 K9 자주포는 20문, 계약 금액 2억5000만달러(약 3500억원)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한민국 무기체계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공산권 국가에 수출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당시 공산권 국가로의 무기 수출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현대로템도 폴란드에 국한됐던 K2 전차 수출을 중남미 페루로 확장시겼다. 현대로템은 이달 초 페루 육군과 K2 전차 54대, K808 차륜형 장갑차 141대 공급에 대한 총괄합의서를 체결하며 국산 전차의 첫 중남미 진출을 알렸다. K2 전차 계약 규모만 19억달러(약 2조7900억원)로 전해진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페루 해군과 호위함 등 함정 4척을 현지에서 건조하는 계약을 맺은데 이어 이달 차세대 잠수함 공동개발 계약까지 체결하며 첫 잠수함 해외 수출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K-방산의 아쉬운 점은 하반기 폴란드 해군의 신형 잠수함 도입 사업인 '오르카 프로젝트에서 한화오션이 최종 탈락하고 스웨덴 기업 사브가 선정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성능과 가격 경쟁력에서는 한국이 앞섰으나 유럽연합(EU)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간의 정치적 결속력과 유럽 내 방산 블록화를 넘지 못해 고배를 마신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2026년 K-방산의 핵심 과제는 ▲최대 60조원 규모의 캐나다 잠수함 사업(CPSP) 수주 ▲항공 엔진 등 핵심 기술 국산화 ▲방산의 G2G 거래 특성상 정부의 세일즈 외교 강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 독일과 최종 수주를 놓고 경쟁 중인 캐나다 잠수함 사업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그리고 정부가 '원팀'이 제대로 된 팀워크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캐나다는 내년 3월 초까지 한국과 독일로부터 제안서를 받은 후 5월 최종 사업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도 수주를 측면에서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현재 캐나다는 한국의 잠수함 계약 시 한국과 절충교역 형식의 사업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방산 수출에서 흔히 적용되는 절충교역은 한 나라가 해외에서 무기나 장비 도입 시 계약 상대국으로부터 기술이전이나 부품 제작·수출 등 반대급부를 받는 무역 방식이다.
현재 캐나다가 요청한 분야는 광물 수출과 자동차 분야 현지 투자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같은 캐나다의 요구에 정부에서 합리적이고 신속한 대응 여부에 최종 결과가 결정될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을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무기 생산국"으로 평가했다. 방산 전문가들은 “이제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를 넘어 글로벌 안보 질서를 주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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