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구씨 작가] 나는 욕심이 없는 편이다. 어린 시절부터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것으로 인해 감정적인 변화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평온한 쪽에 가까웠고 의도와 무관하게 차분해 보인다든가 평온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라왔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주다 보니 욕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자신을 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게 된 것도 있다. 더하여 사람들이 평해주는 그런 이미지가 스스로 만족스럽기도 했다.
과거에는 내가 하는 작업을 누군가가 더 잘 해낸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한 명이 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가 더 잘한다면 그것을 굳이 나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인지 작업을 공유하고 설명하는 것 앞에서 망설임이라든지 어떤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내 작업과 비슷하게 진행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과 우리가 비슷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이야기를 선택했을 수 있겠다는 끄덕임은 당연했지만, 아주 조금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생각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욕심보다 평온함이 조금 더 쉬웠다.
욕심과 닮았다고 볼 수도 있는 승부욕은 가끔 올라오지만, 요즘처럼 인생에 이기고 지는 게임이나 경쟁 자체가 없는 시기에는 승부욕이라는 것이 발동할 기회조차 없다. 습관처럼 안일해지는 마음과 선택 앞에서 큰 고민 없이 골라버리는 게 버릇이 된 것 같다. 고저 없는 편안한 마음도 좋지만 1년에 기회가 많지 않은 작업과 전시를 하는 과정에서 무뎌진 상태의 마음은 이상한 아쉬움을 남긴다. 안일함과 같은 무딘 감각 속에서 선택된 것은 좋고 나쁨에 대한 개인적인 피드백을 내리기도 어렵다. 모든 선택들은 결국 시간과 뒤엉켜 지나가고 만다. 욕심이라는 것이 열심히 하는 것과 연결될 수 있고, 더 나아가 책임감이라는 것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욕심을 갖고 작업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내가 내린 안일한 즉흥적인 선택들은 즉흥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갑자기 뜬금없다는 의미보다는 큰 고민 없이 무엇인가를 골랐다는 점에서 즉흥이라는 표현이 붙는다. 작품이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한 공간에서 달라 봐야 얼마나 다르겠느냐-라는 과거의 결정들은 여기 걸었다가 떼고 저기 걸고, 이리저리 조명을 움직이며 최고의 디피를 찾아내는 예술 인간들을 통해서 오만한 결정으로 판가름 났다. 그들의 최선을 다하는 방식은 내가 말하는 욕심이라는 단어와 영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들의 성격과 타고난 미감에 따른 방식에 따른 일 처리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그것을 닮고 싶기에 그것을 욕심이라는 쉬운 단어로 빗대어 표현하며 따라가 보려 한다.
아직도 욕심이라는 단어가 약간은 부정적으로 다가온다. 이기적인 선택을 할 것만 같은 욕심을 살살 구슬려 작업에서 새로운 원동력으로 삼고 싶다. 지금까지 숲과 나무 중 숲의 존재 자체에 초점을 맞추며 단계를 밟아왔다면, 이제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를 낱낱이 보고 싶은 나의 마음이 있다. 많은 수련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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