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지 않는 정의⑨]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 인터뷰 “투쟁은 두려움 아닌 ‘돌아갈 믿음’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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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지 않는 정의⑨]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 인터뷰 “투쟁은 두려움 아닌 ‘돌아갈 믿음’에서 시작됐다”

투데이신문 2025-12-31 11:05: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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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이 인터뷰에서 촬영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 ⓒ투데이신문<br>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이 인터뷰에서 촬영에 대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권신영 기자】반백 년간 부단히도 이어져 온 저널리즘 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여 2025년의 한겨울에 꽃을 피웠다. 바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이하 동아투위)의 촬영이 진행되면서다. 과거 투쟁한 기록에 대해 증언하는 이영록(80) 위원의 목소리는 과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외치던 결의의 불씨가 여전히 꺼지지 않고 남아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시들지 않는 정의’ 촬영에 임하는 그의 시선에는 정부와 언론사의 왜곡과 탄압을 뚫어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서대호 작가는 촬영 현장에서 동아투위 위원들의 기억을 끌어내는 데 깊이 열중했다. 이 위원은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되면서 자유언론의 유산을 후세대에 남기고자 동아투위의 상징물을 품에 끌어안고 복잡한 현장을 빠져나왔고 그 의미를 환생시킨 주인공이다.

그의 선택은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참여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유년에 꿈꿨던 언론인의 자세와 그가 믿어온 동아일보의 위상을 지키고자 했던 마음이 그 결단의 바탕이었다. 해직 이후 시간이 흘러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언론계로 복귀할 기회가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여섯 식구의 가장으로서 또 언론계를 떠난 지 십수년이 지난 상황에서 그는 끝내 돌아갈 수 없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유언론을 위한 동아투위 활동도, 동아일보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동아투위 50년의 여정을 빠짐없이 동행하며 당대 언론인들의 명예와 후세대 기자들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들을 총동원해 운동을 이어왔다.

강남 소재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이번 촬영은 동아투위 위원들의 오래된 기억을 다시 불러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기록의 장이 됐다. 이번 촬영에서 이 위원은 ‘실거베라’와 연결됐다. 서대호 작가가 이 위원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결론이었다. 꽃말은 ‘은혜’와 ‘감사’다.

사진 속 실거베라의 꽃대는 흔들림 속 꺾이지 않고 곧게 서 있다. 흔들림은 곧 억압의 시대 속 언론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진통을 의미하며 곧게 오른 꽃대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 투철한 의지를 상징한다. 자유언론을 향한 투쟁에 바친 꽃 한 송이의 곁에 선 이 위원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위상과 명예를 드러냈다.

촬영장에서 그는 오랜 과거를 떠올리며 자신의 해묵은 상처를 다시 들여다봤다고 증언했다. 이 위원은 자신의 선택이 인생을 크게 뒤틀었다고 평가하면서도 “후회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과거의 선택은 기자로서 ‘쓰고 싶은 걸 쓰기 위한 결단’의 산물이었고 그 의지 덕분에 그는 50년 가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을 총동원해 언론운동을 이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과거를 향한 ‘용서’란 어떤 의미일까.  <투데이신문> 은 이 위원의 초상을 사진에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 그의 기억과 꿈을 다시금 그려보기로 했다.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이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사라진 기대를 다시 마주보다

Q. 이번 촬영은 ‘시들지 않는 정의’를 주제로 50여 년 전 그날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꺼내 기록하고 오늘의 우리가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콘셉트로 진행됐다. 쉽지 않은 이야기들을 카메라 앞에서 다시 꺼내는 자리였음에도 촬영 내내 표정이 꼭 어둡지만은 않으셨는데. 촬영에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

이번 촬영은 마치 하나의 작품 속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평소 이런 사진을 접해본 적이 많지 않아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촬영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밖에서는 우리가 ‘투쟁’을 벌였다고 말했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즐겁게, 두려움 없이 언론운동에 뛰어들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Q. 이번 사진 촬영을 함께 진행한 서대호 작가는 국내 인물사진 분야에서 손꼽히는 거장이자 한 사람의 얼굴과 표정에 담긴 시간을 깊게 끌어내는 인물사진 전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 작가와 마주 앉아 카메라 앞에 선 경험이 위원님께는 어떤 인상을 남겼나.

긴장이 되지는 않았고 서 작가가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고자 했다. 촬영 콘셉트가 과거와 기억,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옛날을 떠올리려 노력하긴 했지만 아주 깊게 감정이 북받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해서 고통스러운 감정은 없었고 순간순간 옛 기억을 되짚는 기회를 갖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

Q.  이번 촬영 기획은 그간 사회와 정부가 제대로 전하지 못한 사과의 뜻을 동아투위·조선투위 원로들께 다시 전하고자 시작됐다. 여전히 책임 있는 주체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마땅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이 같은 현실에서 위원님이 생각하는 ‘용서’는 무엇인지, 이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듣고 싶다.

동아일보를 나온 뒤 한동안은 그래도 그 언론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에 대한 원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심지어는 동아일보 건물을 정문으로 드나들지 않고 일부러 돌아가던 적도 있을 만큼 마음이 복잡했다. 그만큼 상처도 컸다. 여전히 회복할 수 없을 상처라고 느낀다.

해직 이후 1978년 한 경제단체에 몸을 담을 때만 해도 언론사가 아닌 회사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스스로 “1년만 버티고 다시 편집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까지 했을 만큼 비정상적인 시간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언론 현장으로 돌아갈 길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그곳에서 정년을 맞은 뒤 임원 임기까지 마치고 은퇴하게 됐다.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단 하루라도 편집국 한쪽,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아 보고 싶다는 바람이 남아 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기사 한 줄을 고치고 후배의 원고를 함께 들여다보며 한때 몸담았던 제작 현장이 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내부 사람들과 직접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먼 과거를 돌아보면 투쟁을 선택한 것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함께 있었다. 하지만 올해로 50년이 되었음에도 회사와 정부로부터 어떤 사과나 보상도 받지 못하면서 이제는 용서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놓아주기로 했다. 현재로서는 기대의 소멸, 씁쓸함 같은 감정이 남아 있다.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이 인터뷰 도중 자신의 사진과 기록이 담긴 책 앞에 양손을 깍지로 끼고 있다. ⓒ투데이신문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이 인터뷰 도중 자신의 사진과 기록이 담긴 책 앞에 양손을 깍지로 끼고 있다. ⓒ투데이신문

기자로서 살고자 한 그날의 기억들

Q.  이번 촬영이 흑백으로 진행되다 보니 책 <우리는 아직 거리에> 에 실린 위원님의 흑백 사진들도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것 같다. 오늘 촬영장에도 직접 옛 흑백 사진을 챙겨 왔던데. 그 사진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찍힌 사진인지 소개해 줄 수 있나.

당시 우리 기자들에게 도움을 줬던 대학생들이 떠올랐다. 정부와 경찰은 우리 기자들이 대학생 운동을 선동하고 배후 조종했다는 누명을 씌워 조사를 진행했는데 이때 학생들도 함께 연루되는 사건이 있었다. 챙겨온 사진을 보면 풀려났다는 사실에 동료들과 함께 밝게 웃고 있다.

이 사건은 일부 이화여대생들이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을 돕기 위해 손수건에 의미 있는 그림과 글을 넣어 판매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원가가 100원이면 300원을 받고 손수건을 팔았다고 했다. 해직 전부터 이대 출입기자로서 동아사태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교수들과 학보사에 나눠주곤 했는데 그 유인물이 학생들에게 전해진 것이 빌미가 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가 씌워졌다.

영장도 없이 보름 넘게 구금돼 서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나 구속은 피했고 이전에 서대문경찰서에 출입해 경찰들과 일면식이 있던 터라 큰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은 검찰에 송치되어 고생을 겪었다고 들어 먼저 풀려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이때 경찰의 압수수색을 우려해 배우자가 자택에 있던 물건들을 대거 태워 없앴는데 당시 행방이 묘연했던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가 소실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었다.

Q. 해직 당일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투쟁 현장에서 마지막에 챙긴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족자를 챙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묻자면.

1975년 3월 17일 새벽, 편집국이 폭도들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 족자가 걸린 자리에서 끝까지 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낭독한 뒤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고 계단 통로로 빠져나왔다. 글씨에 조예가 깊던 선배가 써서 족자 형태로 만든 ‘자유언론실천선언’은 편집국 3층 중앙 기둥 한 면을 꽉 채우다시피 한 대작이었다. 서체에 힘이 넘쳐났고 약 다섯 달 동안 내내 그 자리에 걸려 있었다.

다들 긴장하고 어수선해서 ‘족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까지는 신경을 못 쓴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건 동아일보사 안에 그대로 두고 나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도 모르게 족자를 거두어 잘 말아서 들고 나왔고 곧장 집으로 가져가 숨겨뒀다. 그 족자는 그냥 종이에 휘갈긴 문구가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다잡고 버티게 해주는 긍지의 상징, 말하자면 깃발 같은 존재였다. 어떤 조직이든 깃발 같은 상징물은 필수적인 존재이지 않나.

그 뒤로는 투쟁 거점을 옮기고 생계가 흔들리는 과정 속에서 족자 행방이 한동안 묻혔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뜻밖에도 세상을 떠난 강정문 위원의 서재에서 다시 발견됐다. 그 이후 훼손 위험이 커서 보존처리를 한 다음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누구든지 족자를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 이 일련의 과정에 대해 물으면 ‘생환’, ‘환생’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Q. 이번 촬영은 50여 년 전 그 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다시 꺼내 현재의 시선으로 기록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자리를 통해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때의 ‘젊은 나’에게 한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어떤 당부를 해 주고 싶나.

기자라는 일은 글을 잘 쓰는 기술 이상으로 왜 쓰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시절 동아일보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는 1등 신문이었고 당시에 자부심을 느끼며 일했지만 회사가 성장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기자의 신념이 흔들리는 순간들도 있었다. 그럴수록 원칙을 지키고 하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잘 판단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당시에는 언젠가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언론 운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로 인해 인생이 크게 뒤틀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말라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흔들림 없이 가는 것이 결국 자신을 지탱해 줄 것이라고 30살의 나에게 전하고자 한다.

서대호 사진작가가 포착한 동아투위 이영록 위원의 초상. 정면을 곧게 응시하는 날카로운 눈빛으로부터 언론탄압을 일삼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을 향한 비범한 비판의식이 꺼지지 않고 담겨 있다. ⓒ서대호 작가

죽음도 막지 못한 진실된 역사

Q. 사과를 요구하기는 중단했으나 동아투위의 여정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동아투위의 여정이 이 위원에게 어떤 의미로 남기를 바라나.

그간 동아투위가 해온 활동은 사실상 반응 없는 메아리 같았다. 그래서 이제는 더 기대를 접었다. 억지로 사과를 받아봐야, 사과는 마음에서 나와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본다. 

원상회복을 말하기에도 늦은 시점이다. ‘원상’이라는 말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는 지점이 생겼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 문제를 언론계 후배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기고 동아투위가 앞에 서기보다 병풍 역할을 하려 한다. 그렇다고 손을 완전히 놓는 것은 아니다. 후배들이 활동을 이어갈 때 뒤에서 응원하고 보탤 수 있는 방식으로 힘을 보태려 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뒤다. 우리 동아투위가 자유언론을 위해 투쟁한 역사를 왜곡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업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벌써 동아투위 활동 인원 113명 중 41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번 촬영을 비롯한 앞으로의 동아투위 활동은 이를 막고 투쟁과 신념이 진실된 역사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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