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발자취42] "여성 역사의 기관차" 브리지트 바르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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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발자취42] "여성 역사의 기관차" 브리지트 바르도 작고

저스트 이코노믹스 2025-12-30 22:32: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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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삽화=최로엡 ai화백
패러디 삽화=최로엡 ai화백

불멸의 ‘B.B.’ 고독한 성채에서 생명의 수호자로 잠들다

  2025년 12월 28일, 프랑스 남부 생트로페의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자택 ‘라 마드라그(La Madrague)’에서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고요한 작별 인사가 전해졌다. 1960년대 성적 해방의 아이콘이자 전 세계적인 섹스 심벌이었으며, 인생의 후반전을 동물의 고통을 멈추기 위한 치열한 투쟁에 바쳤던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rigitte Bardot)가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녀의 재단 대변인 브루노 자클랭은 바르도가 자택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으며, 임종 직전 네 번째 남편 베르나르 도르말에게 "사랑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그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을 창당한 장마리 르펜의 고문이었던 남성과 1992년 네 번째 결혼을 했다. 바르도는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 국민연합 의원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서한을 보내 또다시 논란을 일으켰다. 2018년 영화계에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확산했을 때는 성범죄에 항의하는 여성 배우 대부분이 “위선적”이고 “우스꽝스럽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리며 전 세계 남성들의 심장을 멈추게 했던 그녀는, 이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개와 고양이, 염소들이 잠든 정원의 나무 십자가 아래로 돌아갔다.   

신이 창조한 여자’: 부르주아의 반항아에서 국가적 상징까지

1934년 파리의 부유한 기업가 가정에서 태어난 브리지트 안마리 바르도의 어린 시절은 그녀가 훗날 보여준 분출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엄격한 가톨릭 집안의 가풍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예절 교육을 위해 말채찍으로 훈육하기도 했다. 이러한 억압은 역설적으로 그녀 안에 기성 권위에 대한 강렬한 반항심을 심어주었다.  

14세 때 잡지 <엘르(elle)> 의 표지 모델로 발탁되며 세상에 처음 얼굴을 알린 그녀는, 1956년 첫 남편 로제 바딤이 감독한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를 통해 하룻밤 사이에 지구촌의 연인이 되었다. 

 테이블 위에서 맨발로 춤을 추던 그녀의 모습은 당시 보수적인 유럽 사회를 뒤흔든 지진과도 같았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녀를 "여성 역사의 기관차"라 명명하며, 바르도가 코르셋과 인위적인 예절을 집어던지고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드러내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했다고 분석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69년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상징인 ‘마리안(Marianne)’ 조각상의 모델로 그녀를 선정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표현대로, 그녀는 "프랑스 그 자체이자 자유로운 삶의 구현"이었다.

"인기는 독이다": 카메라의 폭력에 신음하던 스타

하지만 화려한 조명 뒤의 바르도는 파파라치라는 "사냥꾼"에게 쫓기는 무력한 "먹잇감"이었다. 그녀는 자택 담벼락을 넘어오는 카메라 렌즈와 사생활을 난도질하는 언론에 깊은 혐오를 느꼈다. 26세 생일날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그녀는 훗날 "인기란 독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삶을 사는 것을 방해했다"고 회고했다.  

동료 배우들과의 에피소드는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강렬했다. 1968년 영화 <샬라코> 에서 호흡을 맞춘 숀 코너리는 그녀에게 매료되어 유혹의 손길을 뻗었으나, 바르도는 단칼에 거절하며 "나는 제임스 본드 걸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또한 알랭 들롱과는 평생의 우정을 나누었는데, 1965년 알랭 들롱의 개 ‘찰리’가 당시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을 무는 사건이 발생하자 바르도가 직접 사과하며 사건을 무마한 일화는 유명하다. 

위대한 탈출: "아름다움은 남자에게, 지혜는 동물에게"

1973년, 39세의 나이에 바르도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마지막 영화 <콜리노의 즐겁고 교육적인 이야기> 의 촬영장에서 도살될 위기에 처한 염소를 구하기 위해 출연료를 털어 염소를 사들인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녀는 "나는 나의 아름다움과 젊음을 남자들에게 주었다. 이제 나의 지혜와 경험을 동물들에게 돌려주려 한다"는 명언을 남기고 미련 없이 스크린을 떠났다. 

이후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1977년 캐나다의 하프물범 사냥터에서 피범벅이 된 얼음 위에 누워 새끼 물범을 껴안은 그녀의 사진은 전 세계를 울렸고, 유럽 연합의 물범 제품 수입 금지를 이끌어냈다. 198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그녀는 아끼던 보석과 영화 촬영 소품들을 모두 경매에 부치며 "나는 이제 보석보다 동물의 목소리가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고독한 성채와 복잡한 유산: 빛과 그림자

생트로페의 자택 ‘라 마드라그’는 그녀의 마지막 요새였다. 그녀는 수십 마리의 개, 고양이, 염소들과 함께 지내며 "동물은 결코 인간처럼 배신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고수했다. 그러나 동물을 향한 그녀의 극단적인 열정은 이슬람의 도축 방식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고, 이는 무슬림과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변질되어 다섯 차례 이상 벌금형을 선고받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2001년엔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 집중> 전화 인터뷰에서 “한국은 개고기를 먹어 야만스럽다”고 비판해 논란이 됐었다.

 모성애에 대해서도 그녀는 솔직하고도 잔인했다. 유일한 아들 니콜라의 임신을 "내 몸속에서 자라나는 종양" 같았다고 표현하며 전통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거부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그녀를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세웠지만, 바르도는 "나는 남의 시선을 위해 살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의 투쟁을 위해 산다"며 결코 굽히지 않았다. 

마지막 인터뷰와 유언: "나는 전쟁터로 나간다"

사망 몇 달 전 진행된 BFMTV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바르도는 9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쟁에 나간다"고 선언하며 프랑스 정부에 잔인한 사냥 관습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듯, 장례식에 "바보 같은 군중"이 모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정원에 소박하게 묻히고 싶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그녀는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다만 동물을 위해 할 일이 아직 남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유일한 대의’를 강조했다. 

 시대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모순

브리지트 바르도는 성적 해방을 상징하는 육체적 우상이자, 동시에 인간 사회의 허영을 가장 증오했던 혐인주의자였다. 그녀의 삶은 빛나는 스타덤과 어두운 정치적 발언들이 교차하는 복잡한 직조물이었으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생명들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사용한 최초의 슈퍼스타였다는 점이다.  

"나는 배우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일 뿐이었다."  

스스로를 연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이제 지중해의 파도 소리만이 들리는 라 마드라그의 흙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평화로운 안식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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