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운명의 통로다. 우리의 마음속엔 항상 삼포 가는 길처럼 복기할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고향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먼 시절은 사람도 가고, 집도 변하고, 형상 없는 정과 한만 서렸다. 처음 나를 만난 H는 갈대와 갯벌과 뿌연 바닷물이 들락대던 선창 포구와 화수리를 보여줬다. 이곳에서 다녔다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잠복한 나의 소년 시절이 떠올라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다. 명절 때마다 선창에 가며 만난 길모퉁이 사거리다.
얼마 전 H의 어머니를 뵈러 가던 길에 화수슈퍼라는 간판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그 많은 세월에도 아직 그 모습대로 본업을 잇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옆의 식당은 뷔페라는 거창한 간판에도 문을 닫고 허수아비처럼 충직히 풍상을 버텨내고 있었다. H와 맺은 인연이 아직 이 거리에 맺혔지만 복잡한 지구별 여행에서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한 해가 간다. 다시 리얼리스트가 돼 불가능한 상상을 꿈꿀 수 있을까. 송년회가 끝나고 차가운 가로등 아래 태엽 풀린 시계처럼 멍하니 섰다. 나를 미행한 실패를 뿌리치고 새해엔 희망을 노래해야지. 명마 로시난테의 등에 올라 길을 나서는 라만차의 기사처럼. 붉은 말에 긍정의 힘을 싣고 박차를 가하자. 불타오르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돌아보지 않으며 믿음으로 고! 지난 시간은 소각된 비망록일 뿐.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