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기세등등했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말에 의기소침해졌다. 올해 225개 행정명령을 발표하고 관세전쟁을 일으켜 교역국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뉴욕 시장, 버지니아 주지사 등의 선거에서 공화당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공화당의 상·하원의원 30명이 이미 불출마를 선언해 내년 중간선거 전망도 그다지 밝지 않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선거 구호가 시사하듯이 트럼프 행정부가 당면한 가장 큰 정치적 문제는 경제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조 바이든 행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비판함으로써 압승을 거뒀다. 올 한 해 동안 트럼프 대통령도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데 성공하지 못해 바이든 대통령과 같은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지표상으로 미국 경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관세 인상과 고용시장 부진에도 불구하고 3분기 성장률은 4.3%(전기 대비 연율)였으며 개인소비의 성장 기여도는 2.39%포인트에 달했다. 그러나 체감상 경기는 상당히 좋지 않다. 감당 가능한 비용을 의미하는 어포더빌리티(Affordability)라는 단어가 유행할 정도로 지난 몇 년간 주거비와 식비가 중산층도 부담을 가질 정도로 올랐다. 주택 가격이 급등하면서 세입자의 절반 정도가 소득의 30% 이상을 주거비로 쓰는 ‘주거비 부담 가구’로 분류되고 있다. 공급망 교란과 관세전쟁으로 식자재 가격도 장 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올랐다.
17일 대국민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물가 상승을 바이든 행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동의하는 유권자는 많지 않았다. PBS방송과 NPR, 여론조사기관인 마리스트가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38%,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54%였다. 경제 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1, 2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낮은 36%에 불과했다. 생활비가 감당할 만하거나 매우 감당할 만하다고 답한 응답자는 이전 조사의 55%에서 크게 하락한 30%였다. 지지율의 반등이 없다면 내년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
외치보다는 내정에 집중해야 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대외전략을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고 있다. 내년 4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인공지능(AI)용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를 완화했으며 중국에 도발적 발언을 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거리를 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협상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연합(EU)과 달리 러시아에 유리한 종전 협상안을 우크라이나가 수용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트럼프주의의 퇴조는 관세 인상 위협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내년 4월 베이징 방문 전후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정치적 동력이 상실된다는 점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미우나 고우나 트럼프 대통령은 핵보유국과 적대적 두 국가론을 선언한 김 위원장을 국제무대로 끌어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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