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 인사 지형이 바뀌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 듯하지만, 세부적인 숫자와 흐름을 살펴보면 뚜렷한 방향이 보인다. 평균 연령은 예년보다 낮아졌고, 외부 인재 영입 대신 내부 승진을 택하는 비율이 확연히 늘었다. 또 재무 중심의 경영자보다 기술과 현장 경험을 갖춘 이들이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 눈에 띈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기업들이 '안정적이면서도 실행력이 있는 리더'를 찾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0일 발표된 각종 기업 자료를 종합하면 올해 하반기부터 연말까지 새로 선임된 500대 기업 신임 최고경영자는 총 55명이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57.7세로, 지난해보다 2.1세 낮아졌다.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세대교체가 실제로 진행 중이라는 뜻이다. 60대 초중반이 일반적이던 과거와 달리, 이젠 50대 초중반 경영자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세대가 점차 바뀌고 있다.
연령별로 보면 1960년대생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1970년대생도 두 자릿수 비중을 드러냈다. 반면 1950년대생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최연소 CEO는 40대 초반으로, 일부 산업에선 이미 '50대 CEO'가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 같은 흐름의 배경엔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 도입, 그리고 빠른 사업 구조 재편이 필요하다는 현실이 반영돼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내부 승진의 확대다. 신임 CEO 가운데 90% 이상이 해당 회사에서 오랜 경력을 쌓아온 내부 인사였다. 외부 인물 영입으로 큰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조직과 사업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이 맡아 위험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실제 여러 기업들은 "검증된 인물", "조직 안정성", "연속성" 등 키워드를 내세우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불확실한 경영 환경과도 맞닿아 있다. 세계 경기 둔화와 지정학적 위험, 금리·환율 변동성, 산업 구조 변화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무리한 실험보다는 내부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대기업일수록 조직 충격을 최소화하는 인사 기조가 뚜렷하다.
직무 배경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과거엔 재무나 기획 출신 비중이 높았지만, 최근엔 생산·제조·기술·현장 경험을 지닌 인사가 부각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숫자 관리에만 집중하지 않고 실제 사업 현장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기술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리더십이 중요해졌다는 방증이다.
특히 제조업, 통신, 에너지, 인프라 등 업종에는 현장 경험이 많은 이들이 CEO로 선임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기술 변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전략을 세우는 동시에 실제 실행까지 이끌 수 있는 리더가 각광받고 있다. 단기 실적에 급급하기보다는, 중장기 경쟁력 확보에 무게를 둔 인사라는 평가도 나온다.
학력과 성별 면에선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주요 대학 출신의 비중은 여전히 높고, 여성 CEO 역시 소폭 늘었지만 여전히 적은 편이다. 다만 특정 대학에 집중됐던 현상은 조금씩 완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공학이나 기술계 출신 CEO가 늘고 있다는 점은 달라진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인사 흐름을 '보수적이지만 정체된 선택은 아니다'라고 본다. 외부 인재에 크게 의존하기보다는 내부 인재로 변화를 꾀하되, 연령과 직무 경력에서 점진적인 혁신을 시도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인공지능, 데이터 기반 경영, 사업 구조 개편을 과제로 내세우면서 새 경영자들에게 실행력을 강조하고 있다.
불확실한 경영 환경이 길어질수록 CEO 인사는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부 인사 승진과 현장형 리더의 부상은 단기 대응에 그치지 않는다. 이 같은 현상이 앞으로 기업 체질 개선으로 이어질수 있을지 이목이 쏠리고 있다.
[폴리뉴스 이상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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