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앞두고 은행권이 가계대출 총량 관리를 이유로 잇따라 대출 창구를 닫아 걸면서 서민 실수요자들의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갈아타기(대환) 대출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막히면서 대출 시장이 얼어붙고 있다.
금융당국은 가계부채 총량 억제를 위해 연초부터 강도 높은 관리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방침이지만 실수요자의 자금 공백과 금리 부담 확대 등 부작용이 발생하면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총량 규제가 실수요자 보호라는 본래 취지와 달리 대출 수요를 고금리·고위험 상품으로 밀어내며 가계부채의 질적 악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대출은 막히고 잔금일은 다가오고"…얼어붙은 대출 시장, 서민 피해 우려
연말이 가까워지자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창구가 사실상 '부분 폐쇄' 상태에 진입했다. 은행들은 올해 제출한 가계대출 증가 목표치를 초과할 경우 내년도 대출 한도 감액 등 페널티를 받을 가능성이 커지자 4분기 들어 신규 대출 취급을 대폭 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은행은 주택구입 목적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생활안정자금 목적의 주담대까지 접수를 중단했고 전세대출 및 타행대환(갈아타기) 대출도 동시에 제한하고 있다. 영업점 대면 접수를 막고, 비대면·모집인 채널까지 차단하는 '전방위 조치'가 확산되고 있다.
연말마다 반복되던 '대출 한도 축소' 관행이 올해는 한층 더 강화되면서 시장에서는 단순한 계절적 현상을 넘어 '대출 셧다운'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특히 금융당국이 하반기 가계대출 증가 목표를 추가로 낮춘 가운데 총량 관리를 금리 조정이 아닌 '물량 통제' 방식으로 집행하면서 실수요자의 선택지는 급격히 좁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출이 필요해도 신청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크게 타격을 입는 대상이 서민 실수요자라는 점이다. 김상화 씨(44·남)는 "은행권에서 대출 실행이 불가능해 계약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 계약금만 날리게 생겼다"며 "한도를 맞추려면 지금보다 금리가 비싼 신용대출이나 제2금융권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자금 계획을 주택 구매 계약과 함께 이미 확정한 상태에서 대출 제한이 돌연 강화되면서 단기간 대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곧 높은 금리, 짧은 만기, 불리한 조건의 대출로 이동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실제 일부 소비자들은 주담대와 전세대출이 막히자 신용대출이나 마이너스통장으로 급하게 자금을 충당하고 있다. 고정금리가 아닌 변동금리 위주의 신용대출 비중이 증가하면서 상환 부담은 더 커지고 가계부채의 질적 위험은 확대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계대출 총량은 억제되더라도 더 취약한 형태의 부채가 늘어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셈이다.
또 시장금리 상승으로 대출 금리가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은행채 금리 상승이 조달비용 인상으로 직결되면서 대출이 가능한 차주조차 이전보다 높은 이자 비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출은 막혔는데 금리는 오르면서 서민 실수요자의 부담만 더해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총량 규제의 그늘…"실수요자 보호" 취지 무색, 금융시장 왜곡 심화 우려
금융당국은 내년에도 가계부채 총량을 경상성장률보다 낮은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할 방침이다. 연초 대출 공급이 급격히 풀리고, 연말에 다시 창구가 닫히는 '연초 완화·연말 차단'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월별 관리 체계를 강화하겠다는 계획도 내놓고 있다. 총량을 일정하게 나눠 공급하는 방식으로 대출 급증과 급감의 변동성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현장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대출 총량 관리가 개인의 상환 능력과 위험도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일정 시점 이후 일괄적으로 대출 공급을 조였다 풀었다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실수요자의 자금조달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출 실행 가능 여부가 전체 가계대출의 증감폭에 따라 달라지다보니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생계형·주거형 차주에게 대출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필수적 생계 기반과 직결된다는 점은 총량 규제의 사각지대로 지목된다. 실수요자를 보호하겠다며 도입한 규제가 오히려 실수요자를 더 취약한 금융 환경으로 밀어내는 역설적 모습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현행 총량 관리가 구조적으로 금융시장의 왜곡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연말마다 대출 절벽이 반복되면 시장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차주들은 그때그때 대출 조건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수요자들 입장에선 규제 타이밍에 맞춰 단기적·불안정한 자금 운용이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다.
또 가계부채 관리의 초점이 총량 억제에 집중될 경우 정책 효과가 서민층에 더 강하게 전가될 우려도 제기된다. 고소득·고자산 차주는 현금 또는 우량 대출로 대응할 여지가 있지만 중·저소득층은 고금리·고위험 대출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동일한 규제에서도 계층 간 부담이 달라진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금융당국은 총량 관리가 금융시스템 안정성과 거시경제 리스크 완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가계부채의 절대 수준이 여전히 높은 만큼 구조적 조정을 지속하지 않을 경우 더 큰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문제는 이러한 규제 기조가 장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대출 총량 규제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실수요자 보호 체계와 대출 구조 전반에 대한 정교한 보완책이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서진형 광운대 교수는 "대출 총량 관리가 금융안정이라는 취지는 좋지만 그 이면에 실수요자의 부담과 시장 왜곡을 어떻게 잡을지 여부는 미흡하다"며 "대출 창구를 닫는 방식의 관리가 반복될수록 실수요자의 금융 접근성은 좁아지고 부채 구조는 더 취약한 방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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