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손보승 기자]
100년 역사 ‘워너 왕국’, 스트리밍 공룡 품에 안기나
미디어 제국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WBD)’를 둘러싼 인수전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 최대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가 WBD와 100조 원대가 넘는 초대형 인수 계약을 체결하며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미디어 명가 재건을 꿈꾸는 파라마운트가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시하며 ‘적대적 M&A’라는 초강수를 뒀기 때문이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등판해 독점 규제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이번 인수전은 단순한 기업 결합을 넘어 글로벌 미디어 패권의 향방을 가를 세기의 대결로 확전 되고 있다.
넷플릭스, 엔터테인먼트의 종언을 고하다?
포문은 넷플릭스가 열었다. 지난 12월 5일(현지 시간), 넷플릭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워너 브러더스 디스커버리의 영화·TV 스튜디오,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 등을 포함한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최종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인수 금액은 약 720억 달러 규모다. 이번 계약에서 CNN, TNT 등 뉴스 및 스포츠 채널은 분리 매각 대상이 되어 제외되었지만, 워너 브라더스가 지난 100년간 축적해 온 방대한 콘텐츠 라이브러리와 할리우드 최고의 제작 시스템이 고스란히 넷플릭스의 품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점에서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CEO는 이번 인수를 두고 “‘카사블랑카’, ‘시민 케인’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부터 ‘해리 포터’, ‘프렌즈’ 같은 현대 인기작까지 워너 브러더스가 보유한 놀라운 작품 라이브러리가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케이팝 데몬 헌터스’, ‘오징어 게임’과 같은 한 시대를 정의하고 있는 이야기들과 합쳐진다면, 전 세계를 즐겁게 하겠다는 목표를 보다 수월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넷플릭스와 HBO 맥스의 합산 가입자 수는 4억 5,000만 명에 달하며, 이는 디즈니나 파라마운트 등 경쟁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수치다.
업계에서는 이번 합병이 성사될 경우, 넷플릭스가 단순한 플랫폼을 넘어 콘텐츠의 기획, 제작, 배급까지 완벽하게 장악하는 ‘완전체 미디어 제국’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넷플릭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명성 높은 스튜디오 중 하나를 손에 넣고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거대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로이터통신도 “왕좌의 게임, 해리 포터 등 대표 프랜차이즈의 IP를 사들이는 것은 할리우드의 권력 균형을 넷플릭스 쪽으로 한층 더 기울이게 할 것”이라면서 “이 합병은 스트리밍 업계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고 보도했다.
파라마운트의 반격, 워너는 인수 제안 거부
하지만 넷플릭스의 축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사흘 뒤인 12월 8일,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가 판을 뒤흔드는 ‘폭탄’을 던졌다. 넷플릭스보다 훨씬 높은 금액인 1,084억 달러를 제시하며 WBD 주주들을 상대로 주식 매입을 제안하는 적대적 M&A를 선언한 것이다. 워너브러더스가 주주들에게 제시한 금액은 주당 30달러(약 4만4115원). 넷플릭스가 제시한 금액(27.75달러)보다 2.25달러 높다. 파라마운트는 지난 3분기 2억 5,70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하는 등 경영난을 겪고 있어, WBD 인수를 통한 반전이 절실한 상황이다.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WBD 이사회는 넷플릭스의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워너 브라더스 이사회는 주주들에게 파라마운트의 제안을 거부하고 넷플릭스와의 합병을 지지할 것을 권고하기로 했다. 표면적인 금액은 파라마운트가 훨씬 크지만, 이사회가 주목한 것은 ‘거래의 안정성’과 ‘미래 가치’였다. 파라마운트의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한 의구심이 컸던 탓이다. 파라마운트의 데이비드 엘리슨 CEO 집안이 신탁으로 지분 투자를 보증하기로 했으나, 이사회는 언제든 자산이 회수될 수 있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넷플릭스는 막강한 현금 동원력과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며 이사회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넷플릭스는 여론전에서도 한발 앞서 나가고 있다. “스트리밍 회사가 영화를 죽일 것”이라는 영화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렉 피터스와 테드 서랜도스 CEO는 인수 후 스트리밍에만 집중하지 않고 극장 개봉 사업에도 집중할 것이라며 할리우드 달래기에 나섰다. 또한 워너 브라더스 영화의 극장 개봉을 지지하며, 이는 “사업과 전통 유지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과거 “극장 개봉은 구식”이라던 발언을 뒤집으면서까지 할리우드 전통을 존중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와 함께 넷플릭스는 “워너 브라더스와 합병해도 미국 내 시청 점유율은 8%에서 9%로 소폭 상승할 뿐이며, 이는 유튜브(13%)와 파라마운트/워너 브라더스 합병 시 예상되는 점유율(14%)에 여전히 크게 못 미친다”고 강조했다.
규제의 칼날 어디로 향하나
이번 인수전의 최종 승패를 가를 결정적인 변수는 바로 ‘규제 당국’과 ‘정치권’의 개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넷플릭스는 이미 너무 큰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며 “이 결정에 관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반독점법을 앞세워 넷플릭스의 독주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논객들도 넷플릭스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인연을 거론하면서 넷플릭스가 워너 인수를 마무리하면 민주당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워너 브러더스 인수전이 엔터 산업을 넘어 정치권의 문화전쟁 의제가 된 것이다.
영화관 인사들도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미국 극장 소유주 단체인 ‘시네마 유나이티드’도 넷플릭스에 대해 “글로벌 영화 산업에 대한 전례 없는 위협”이라고 비판했고, 미국 영화관 노조도 성명문에서 “넷플릭스의 워너 인수 추진은 전 세계 영화 상영업계에 전례 없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이번 인수로 인해 대형 극장부터 독립 극장까지 모든 극장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이들은 영화의 극장 개봉 시기가 짧아지는 걸 우려한다. 예를 들어 워너가 제작 및 배급하는 영화들의 영화제 등록을 위해 짧은 시간 극장에 걸린 뒤 곧바로 넷플릭스에 공개된다면 누가 극장을 찾겠느냐는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최근 한 팟캐스트에서 “넷플릭스는 영화를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올리기 위해 일주일 동안만 극장에 걸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넷플릭스의 워너 인수 과정에는 최소 12개월 걸리는 미국의 반독점법 심사가 남아있다. 워너와의 거래 종료 시점은 2026년 3분기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이번 계약이 승인되지 않으면 넷플릭스는 58억 달러의 역 위약금을 지불한다. 워너가 계약을 철회하면 28억 달러의 위약금을 내야 한다.
할리우드의 100년 유산이 넷플릭스라는 디지털 제국에 흡수될 것인가, 아니면 파라마운트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인가. 전 세계 미디어 산업의 지형을 바꿀 워너 브라더스 인수전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다. 승자가 누가 되든, 우리가 알던 엔터테인먼트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도 과장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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