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볼리스트] 김정용 기자= 파울루 벤투 전 대한민국 감독의 축구는 ‘국대용이 아니라 클럽용’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국가대표팀에서도 벤투 축구가 결국 성공했는데, 그걸 클럽 축구에 완전히 이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궁금증을 내년에 간접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세르지우 코스타 제주SK 신임 감독은 지도자 생활 내내 벤투 감독을 보좌하는 코치로 활동하다 이번에 홀로서기에 나선다. 그는 “벤투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건 나의 DNA이기도 하다”라며 축구 유전자부터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세르지우 감독이 내놓은 축구관은 벤투가 한국 감독 시절 녹음기 틀듯 되풀이한 멘트들과 똑 닮았다. “주도적이고 긍정적이며 공을 소유하는 경기,” “빠르게 공을 탈취하고 경기를 주도,” “공수에서 균형이 잡힌 팀,” “만약 두 세 번 패스로 상대 진영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긴 빌드업은 필요 없다” 등 기자회견에서 나온 전술적인 표현들은 벤투의 입에서 나왔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벤투 시절과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축구철학을 팀에 심는 속도다. 벤투 감독은 소집기간이 짧은 국가대표 특성상 자신의 축구를 팀에 이식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3년차에 오히려 경기력이 떨어지는 듯 보이자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반면 세르지우 감독은 “게임 모델을 적용하기에 프리 시즌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시간 핑계를 대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것”이라며 빠른 시기에 자신의 축구를 선보일 거라 자신했다.
대표팀과 달리, 프리 시즌 합숙훈련으로 시작해 매주 동고동락하는 클럽 축구에서는 훈련의 양과 연속성이 훨씬 높다. 벤투와 비슷한 훈련 완성도를 유지한다면, 이론상 한국 대표팀보다 조직력이 훨씬 좋은 팀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의구심도 생긴다. 세르지우 감독의 철학은 벤투 감독이 처음 한국에 부임했던 2018년 즈음에서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이는데, 시각에 따라서는 축구가 더 발전하지 못하고 낡아간다고 볼 수도 있다. 세르지우 감독은 “K리그는 밸런스가 깨진 상황이 자주 나온다는 특징이 있다. 역습과 피역습이 반복되는 리그다. 제주에서는 밸런스가 깨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경기를 다른 방식으로 지배하고 싶다. 공수 모두 균형이 잡힌 팀을 만들고 싶다. 공격자원들도 공을 잃어버리면 바로 수비에 가담해야 한다. 상대 진영에 진입하면 선수들이 마음대로 콤비네이션을 맞춰가도록 해 주는 상황도 있겠지만, 전환 상황 등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팀을 잘 꾸려 갈 것이다. 모든 건 우리가 공을 소유하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주도적(proactive)인 축구’는 2018년 당시 김판곤 감독선임위원장이 벤투 감독을 선임한 가장 큰 이유로 꼽았던 특징이다. 이 표현은 2010년 전후로 유럽에서 유행해 2018년까지는 생명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약간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최근 세계 축구의 주류는 경기 상황을 의도적으로 다 통제하는 게 아니라, 혼란이 유리하다면 일부러 통제불가한 혼란을 국지적으로 초래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다르지만 아스널, 파리생제르맹 등 세계 최강 수준의 팀들이 일부러 난전을 만들며 이득을 취하는 식으로 경기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세르지우 감독의 “밸런스가 깨지는 걸 원치 않는다”라고 말한 대목이 가장 세계 축구 흐름과 동떨어져 보인다. 역습 상황에서조차 가능한 대형을 유지하면서 경기 통제권을 유지하는 식의 운영은 펩 과르디올라 맨체스터시티 감독이 가장 선도한 방식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강팀일수록 공을 멀리 때려놓고 기동력과 고강도 운동으로 승부를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까지 감안할 때, 세르지우 감독의 축구가 K리그에서 얼마나 통하는지 확인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의 축구가 세계적인 조류에서 몇년 뒤쳐졌는데도 K리그에서 효과를 발휘한다면, 이는 K리그 전반이 더욱 뒤쳐졌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일년 내내 자기 축구를 조련시키는 벤투’가 세르지우 감독의 제주를 통해 간접 구현된다. 그와 K리그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만남이다.
사진= 풋볼리스트, 대한축구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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