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웅익 더봄] 경복궁 향원정의 추억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손웅익 더봄] 경복궁 향원정의 추억

여성경제신문 2025-12-29 10:00:00 신고

향원정의 가을 /그림=손웅익
향원정의 가을 /그림=손웅익

경복궁 향원정의 붉은 단풍잎이 향원지에 반영되는 매년 가을이면 추억여행을 떠난다. 올해는 가을 내내 벼르다가 향원정 주변 단풍이 한창인 시기를 놓쳤다. 겨울이 내려앉은 경복궁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궁궐마다 한복을 입으면 무료입장이라 그런지 경복궁도 내외국인 가리지 않고 한복을 입었다. 그런데 변형된 한복의 모양이나 색상이 어느 나라 복장인지 어색해서 영 마음이 불편하다.

학창 시절 나는 주말마다 향원정을 찾았다. 미대에 가고 싶었던 나는 기본기를 배우러 미술학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되는 줄 알았다. 큰 고목 아래 이젤을 세우고 수채화로 향원정을 그리고 있노라면 내 뒤쪽에 사람들이 죽 서서 구경했다. 그 시절 나는 지극히 내성적이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구경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 이후 최근까지 가을이면 그림을 그리던 그 자리로 추억여행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익숙해진 향원정은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다. 향원정 남쪽에 취향교가 있을 때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향원정과 향원지를 건너가는 취향교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 그렇게 익숙했기에 최근에 남쪽에 있던 취향교가 철거되고 북쪽에 새로 만들어지고 나서는 한동안 그 경관에 적응이 안 되었다.

새로 만들어진 취향교의 아치 형태가 향원정과 어울리지 않았고, 향원정에 비해 구조물이 너무 큰 것도 어색했고,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것도 거북했다. 취향교가 남쪽에 있을 때는 작고 아담해서 향원정의 조연 역할을 했는데, 새로 만든 다리는 주연 역할을 하려는 듯 도드라진 것이 영 불편했는데 자주 보니까 또 익숙해진다.

향원정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향원정은 정자 건축으로는 특별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대개 정자는 8각형으로 지어지는데 이곳은 6각형이다. 또한 2층으로 되어있는데, 개보수하면서 확인된 바로는 1층 바닥이 온돌 구조다. 정자가 사계절용 휴식 공간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특별하다. 현판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향원정의 겨울 /그림=손웅익
향원정의 겨울 /그림=손웅익

향원정 바로 북쪽에 건청궁이 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처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건청궁에는 당시 아시아에서 최초로 에디슨 전기 회사에서 전등을 설치했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처소인 건청궁과의 관계를 보면 향원정으로 넘어가는 취향교는 지금 복원된 것처럼 향원정의 북쪽 위치가 맞다.

상상해 보자면, 건청궁을 나와 취향교를 건너는 것도 낭만적이지만 향원정 안에서 내려다보는 향원지와 그 주변의 4계절 풍경은 선경이었을 것이다. 특히 1894년 겨울에 얼어붙은 향원지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펼치는 스케이트 시연을 고종과 명성황후는 따뜻한 향원정 온돌방에 앉아 즐겼을 것이다.

그렇게 낭만적이었던 향원지는 비극의 장소로 변한다. 이듬해 1895년 10월 건청궁에서 일어난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건청궁 옆 녹산에서 태운 뒤 남은 재를 버린 곳이 향원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해 겨울 고종과 순종이 여장하고 건청궁을 나서 경복궁의 서측 영추문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는 비극의 역사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흐른 2023년 3월에 윤 전 대통령 부부가 건청궁을 방문해서 명성황후의 침전인 곤녕합에서 10분 동안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명성황후 처소의 물품과 전승 공예품 여러 점을 사적으로 빌려 가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처지를 보면 건청궁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형인가 보다.

겨울이 내려앉은 향원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잔잔한 향원지에 겨울 하늘과 세월을 버틴 고목과 향원정이 담겨있다. 수련이 다 사라진 향원지에 잉어무리가 유영하고 있다. 지난여름 무더위에 말라버린 붉은 단풍 몇 잎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 고등학교 까까머리 시절로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나는 아직도 그 고목 아래 앉아 향원정을 그리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손웅익 건축사·수필가 wison777@naver.com

Copyright ⓒ 여성경제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콘텐츠는 뉴스픽 파트너스에서 공유된 콘텐츠입니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다면?
광고 보고 계속 읽기
원치 않을 경우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